[기자수첩] 기업 대변인 역할하는 교수님들
“아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저러시나.”
12일 서울대 공익산업법센터가 서울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한 남성이 어이없다는 듯 거친 말을 내뱉었다. 발표자로 나선 한 교수가 “발표에 앞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겠다. 주최 측에서 발표 주제만 정해줬을 뿐 어느 방향으로 말해달라거나 특정 자료를 활용해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다”고 말한 뒤 나온 반응이다. 이날 세미나 주제는 ‘ICT 생태계 진화에 따른 방송통신시장 규제의 현안과 과제’였다.
이 교수의 발언과 이 남성의 거친 반응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려면 하루 전에 열린 비슷한 행사를 알아야 한다. 11일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서울대 경쟁법센터 주최로 ‘이동통신시장 경쟁정책방향’ 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대학 교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현재 통신 시장의 결합상품 판매 형태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의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반경쟁적인 구조”라며 이동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을 질타했다.
행사 직후 언론에선 “결합상품 시장에서 SK텔레콤의 독주를 막으려는 ‘반(反) SK텔레콤’ 진영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내용의 보도가 쏟아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플리자호텔에서 열리는 두 번째 세미나때 SK텔레콤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내놨다. 12일 세미나에서 이 교수는 전날의 세미나 내용을 의식하고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며 선을 그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 교수를 비롯한 발표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행사를 주최한 공익산업법센터는 이동통신 3사 중에 SK텔레콤이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둘째 날 세미나 참석자들은 ‘현재의 통신 결합상품 판매 구조는 SK텔레콤의 지배력을 높여준다’는 전날 세미나에서 나온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SK텔레콤에 힘을 실어줬다.
하루 전 세미나를 주최한 경쟁법센터의 후원기업 명단을 보면 KT와 LG유플러스가 포함돼 있다. 설령 두 세미나에 참여한 교수들의 주장이 평소 신념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고 해도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통신 결합상품 존폐 여부는 소비자의 이익을 좌우할 중요한 이슈다. 특정 기업의 후원을 받는 학술단체가 기업 친화적인 교수들을 모아 ‘그들만의 토론’으로 결론 낼 일이 아니다. 기업의 이해와 무관한 전문가와 소비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건전한 토론의 장을 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