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유선전화 정액 요금제에 가입시켜 논란을 일으켰던 KT가 '나 홀로 소송'을 진행한 시민 한창희(38)씨에게 완패했다. 지난달 10일 대법원은 KT측의 상고를 기각했다. KT가 특정한 정액 요금제에 부당하게 가입시켜 더 받아간 요금은 물론 정신적 피해까지 한씨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이다. 유선전화 정액 요금제 부당 가입 피해와 관련해 대법원이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인정한 것은 한씨 사건이 처음이다.
평범한 시민이 거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이기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흔한 일이 아니다. <오마이뉴스>는 11일 한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한씨는 KT와 관련해 겪어야 했던 많은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국민이 키운 KT가 국민 뒤통수 친 격"
한씨는 대전에 사는 직장인이다. 2009년, 한씨는 집에서 쓰는 KT 유선전화 요금제가 자신이 동의한 적이 없는 '마이스타일' 요금제로 설정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씨는 경위를 듣고자 KT 쪽과 여러 차례 통화했다. 그러나 속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석채 KT 회장에게 14장짜리 탄원서도 보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씨는 KT에 크게 실망했다. "KT는 국민이 키운 기업이잖아요. (저희 집만 해도) 부모 세대까지 하면 수십 년 동안 KT를 썼어요. 저도 10년 넘게 KT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했고요. (정액제 부당 가입 건은) 국민의 뒤통수를 치고 배신한 셈이지요."
"국민이 키운 기업, KT." 한씨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이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한씨는 KT에 소송을 제기했다. 한씨는 자신이 소송을 제기하자 KT 쪽에서 '부당하게 더 받아간 요금을 돌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씨는 더 받아간 요금을 돌려받는 것은 물론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입자 동의 없이 특정한 요금제에 가입시킨 것은 '소비자 주권 침해'라고 본 것이다.
한씨는 KT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대전지방법원에 냈다. 2010년 6월, 대전지방법원은 "KT는 더 받아간 요금과 함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30만 원을 한씨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KT는 이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다. 그러나 2심에서도 KT는 패소했다. 2심 역시 KT가 한씨에게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다만 피해 보상 금액은 줄었다.
KT는 마지막으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지난달, 대법원은 KT의 상고를 기각했다. 1심, 2심, 3심 모두 한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로써 KT는 한씨에게 23만여 원(이 중 '정신적 피해 보상금'은 15만 원)을 주게 됐다. 한마디로, KT의 완패였다.
"(대법원에서 승소한 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하는 분도 있고, (축구로 치면) 이름 없는 3부 리그 팀이 레알 마드리드를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분도 있더군요."
한씨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거대 기업인 KT를 이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씨가 변호사도 없이 '나 홀로 소송'을 한 점도 이런 평가에 한몫했다. 한씨는 왜 '나 홀로 소송'을 한 것일까? 그것도 거대 기업을 상대로.
"저도 변호사를 알아봤죠. 여러 변호사 사무실은 물론 법률구조공단에도 갔습니다. 그런데 다들 '못 이길 것 같다'며 맡지 않으려 하더군요. (재판을) 해보지도 않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에 화가 나서 ('나 홀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나 홀로 소송'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법대 출신이 아닙니다. 혼자서 1118쪽짜리 민법 책을 뒤졌죠. 그렇게 해서 제가 작성한 소장, 변론서 등이 수백 쪽입니다."
이와 달리 KT 쪽은 대형 로펌까지 동원했다. "1심 때는 KT 사람 2명과 대전의 한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 1명이 법정에 나왔어요. 그런데 2심 때는 법무법인 세종 소속 변호사 5명이 KT를 대리했습니다."
'세종'은 국내 5대 로펌 중 하나로 꼽히는 굴지의 법무법인이다. 김경한 전 장관(이명박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 대표 변호사를 맡았던 곳이다. 한씨는 "처음에는 법무법인 세종이 그렇게 대단한 곳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대전에 있는 법무법인 중 하나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씨는 어떻게 KT를 이길 수 있었을까?
"KT는 '해당 요금제에 동의한다'는 제 어머니의 녹취록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기자 - 집 전화는 가족이 함께 쓰는 것인 만큼 가입자가 아니라 그 가족이 동의한 것도 유효하다는 논리). 그리고 정신적 피해 보상을 요구한 재판에서 소비자가 패소한 판례, 그동안 KT가 부가서비스 부당 가입 문제로 소비자와 벌인 소송에서 승소한 사건의 판결문 등도 제출했습니다.
이와 달리 전 지극히 상식적인 면에 호소했습니다. '약육강식이 판치면 동물들의 세계와 뭐가 다른 것인가'라는 제 철학을 법정에서 드러냈습니다. 판사들이 이것을 많이 받아들인 것 같아요."
대법원 판결 후에도 한씨는 KT에 실망했다.
"사과 한마디 안 하더라고요. 그러다 (대법원 판결 후) 20일쯤 지나서 KT 서대전지사 여직원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입금하려 하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더군요. 여직원에게 이번 사안에 대해 아는지 물었습니다. '처음 들었고, 본사 지시로 전화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2년 넘게 피눈물 나게 싸워 이겼는데, 회사 책임자도 아닌 지사 여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니요. 사고는 부모가 치고, 서너 살 먹은 아이에게 '가서 사과해라'라고 시키는 격 아닌가요?"
부당 가입 275만 건, 한씨 사례 적용하면 정신적 피해 보상금 4000억 원 이상
얼마 후 한씨 집에는 23만여 원의 금액이 찍힌 우체국 전신환이 도착했다. KT 서대전지사에서 보낸 것이다.
23만여 원. 많다고 보기 어려운 금액이다. 한씨는 "이것 없이, (소송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게 낫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큰돈을 바라고 소송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씨는 "스스로 소비자 대표, 275만 피해 가구 대표라고 생각하고 소송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275만 피해 가구'라는 표현의 근거는 방송통신위원회다. 4월 25일, 방송통신위원회는 KT가 2002~2009년 사이에 3가지 유선전화 정액 요금제 가입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가입자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가입시킨 사례가 약 275만 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씨를 법정에 서게 한 '마이스타일' 요금제도 이 3가지 요금제 중 하나다.
한씨는 KT가 정신적 피해 보상 소송에서 졌다는 사실을 "275만 피해 가구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한씨에게 책정된 정신적 피해 보상금(15만 원)을 275만 가구가 모두 받는다고 가정하면, 그 금액은 4000억 원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