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째 찜질방으로 퇴근하는 51세 그 남자, 어쩌다?
[KT 사람들] <2> 전라도·경상도 곳곳을 '날아다니는' 원병희 씨
KT 노동 문제는 어제오늘 불거진 사안이 아니다. 세상에 알려진 후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노동자 연쇄 사망 등 정도도 심각하다. 공공성을 내려놓고 사유화를 택한 후 '신자유주의 교과서'라는 말에 모자람이 없는 길을 걸어온 KT가 자초한 일이라는 지적이 많다. <프레시안>은 KT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문제를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벌써 7개월째다. KT 고객 불만 처리 담당 직원 원병희(51) 씨는 반년 넘게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매일 아침 찜질방 한구석에서 눈을 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 후엔 저녁을 먹은 후 홀로 찜질방으로 돌아온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아직도 몇 번씩은 잠에서 깨 뒤척이다 다시 잠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전북 전주에서 부인, 딸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 지난 3월 초,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경북 포항으로 느닷없는 인사 발령이 났다. 원 씨는 이 발령을 '현대판 KT식 유배'라고 부른다. 노동자 연쇄 사망 사태 등을 밖으로 시끄럽게 알린 데 대한, 그리고 이석채 회장의 인사를 두고 '낙하산'이라고 손가락질한 데 대한 보복이란 것이다.
직선거리 약 230km. 차로 꼬박 3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원 씨를 '날려 보낸' KT는 포항에서 지낼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해줬다. 그러나 원 씨는 이 거처를 포기하고 낯선 찜질방을 택했다. 그는 "다 쓰러져가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성인 남자 4명이 함께 살라고 했다"며 "그곳에 있다간 우울증이 더 심해질 거 같아 입주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원 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정확하게는 '적응 장애'다. 4년여 전 진단을 받은 이래로 지금까지 25회 이상 상담 치료를 받았다. 원 씨의 담당 의사는 '당신은 다른 치료가 필요 없다. 일단 가족과 살아야 한다. 전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원 씨가 언제쯤에야 가족들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1987년 입사, 주변 부러움 한몸에 받았지만 기쁨도 잠시…
원 씨는 지난 1987년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한통)에 입사했다. 당시 나이 25세. 공공 기관에서 대민 봉사를 하고 싶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공기업인 한통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부러운 시선을 보냈고, 그 자신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었다고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입사 직후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는 "조합원들을 위해 일해야 할 노동조합 간부들은 기관장 술값을 내주러 다니느라 바빴고, 어느 날 갑자기 사무직 직원들을 기술 업무 쪽으로 강제 발령하는 일들도 버젓이 벌어졌다"며 "이런 일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연고가 없는 외딴 지역으로 전근시키는 일들도 횡행했다"고 말했다.
원 씨는 이런 회사 모습을 보면서 점점 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부당 인사 사례들을 수집하고 노동법을 공부했다. 노동부와 법원을 쫓아다니며, 몇몇 인사 조치들에 대해서는 부당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동시에 사내 민주화를 위해 KT 내에 꾸려진 '민주동지회'에 가입, 노조 간부 선거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원 씨가 KT의 악명 높은 살생부, 이른바 '1002 명단'에 오르게 된 배경이다.
'살생부 1002 명단'과 도(道) 경계를 뛰어넘은 원거리 발령
'1002 명단'은 2011년 한 공익 제보자에 의해 폭로돼 일대 파문을 일으킨 KT 내부 문건이다. KT는 2005년 불법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부진 인력(CP) 퇴출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설계하며, 그 일환으로 퇴출 대상자 1002명을 추려냈다. 이후 2009년 도입한 고과연봉제에서 KT는 CP 대상자들에게 대거 D, F 등급을 매기고 연봉 일부를 삭감하거나 원치 않는 지역 또는 직무로 인사 조치했다.
원 씨 역시 이 1002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인사 평가 때마다 번번이 F등급을 맞은 그는 경상도와 전라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전북 부안. 이후 전북 전주, 전북 정읍, 전북 남원을 거쳐 경북 포항까지 날아왔다. 원 씨는 회사에 밉보인 것이 인사 평가에서 거듭 하위 등급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근래 것들만 떼어내서 봐도 상황은 만만치 않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취해진 굵직한 인사 조치만 다섯 건이다. 전주 팔복 전화국 사무직에서 현장 기술직으로 전직(2009년 2월), 전주에서 남원으로 원거리 발령(2010년 2월), 중노위에서 부당 해고로 판정된 해고(2011년 6월), 복직 직후 떨어진 3개월 정직(2012년 10월), 정직 직후 포항으로 원거리 발령(2013년 3월).
"이런 인사 조치를 누가 업무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보겠나. 예컨대 기술 업무라는 건 20~30년씩 해온 전문가들도 자칫하면 사고가 나는 전문 업무다. 전봇대에 올라야 하고 복잡한 기술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데에 기술력도, 경험도 없는 사람을 느닷없이 배치하는 것은 압박을 줘서 내쫓으려는 계산된 의도에서 비롯된 거다."
이석채 회장 취임을 몇 시간 앞두고, '잠깐 좀 같이 가자'
집요한 인사 조치와 함께 '적응 장애'란 질병을 만든 결정적 사건이 있다. 2009년 1월 14일 이석채 회장이 취임하던 주주 총회를 몇 시간 앞두고 벌어진 "납치 미수 사건"이다.
원 씨와 몇몇 민주동지회 동료들은 당시 주총에서 이석채 신임 회장에게 새 경영 전략과 구조조정 방침 등에 관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던지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회장이 KT의 새 사령탑을 맡음과 동시에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될 거란 우려가 안팎으로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계획은 어느새 새어나갔고, 회사는 '주총 방해 세력'을 단속하는 데 분주했다. 갖은 설득과 회유에도 원 씨가 주총 참석을 고집하자, 행사 전날 저녁엔 열 명가량이 원 씨의 집까지 찾아와 위협적인 설득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원 씨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자, '일단' 집 앞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인 14일 새벽 4시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전해졌을 거라 생각하고 집을 나선 원 씨를 밤새 승합차 안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들이 일순간에 에워싸고 무작정 동행을 강요한 것.
"그날 새벽에 눈이 많이 내렸던 게 기억난다. 아파트 입구를 딱 나오자마자 새카만 사람 10여 명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들었다. '왜 이러냐'고 하니까 일단 '잠깐만 좀 가자'고만 했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다 아는 직원들이었다. 결국 다시 경찰을 불렀고, 경찰차를 타고 인근 지구대로 일단 도망갔다."
지구대에 잠시 머무르면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지구대 주변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마음이 급해진 원 씨는 약속 장소인 모 톨게이트까지 데려다 달라고 경찰에 부탁했다.
"경찰차를 타고 가는데도 뒤에서 계속 차를 몰고 따라오더라. 톨게이트에 도착해 동료가 주차해놓은 차로 옮겨 타려고 하니 우르르 달려와 에워싸서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경찰이 주변에 있는데도 거침이 없어 놀랐다. 결국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인근 시민 단체 사람들을 부르고 한 시간가량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다 해가 뜨자 풀어줬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주총에 참석할 수는 있었지만, 이 일은 원 씨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다. 원 씨는 "이날 이후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불쑥불쑥 올라온다"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생각해봐라. 캄캄한 밤에 성인 남자 10명 정도가 우르르 나를 에워싸는 광경을. 이날 받은 충격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에게도 상처
KT에 맞선 지난한 싸움으로 트라우마가 깊어진 건 원 씨만이 아니다. 이를 옆에서 줄곧 지켜본 가족들에게도 쉽사리 아물지 않을 상처가 생겼다. 원 씨는 "하도 인사상 불이익을 많이 겪으니 딸과 아내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나 못지않게 많이 받았다"며 "주총 납치 미수 사건은 너무 엄청나서 딸에게는 몇 년이 지나고서야 얘기해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몇 달 전엔 원 씨의 부인이 갑자기 신체 마비 증상을 보여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딸한테 5월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울면서 '엄마가 돌아가실 거 같다'고 하더라. 무슨 말이냐고 놀라 물으니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고 손발이 마비돼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멀리 포항에 떨어져 가족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니 무기력했다. 겨우 휴가를 내서 가보니 딸과 전주에 있는 친인척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겼더라. 그러나 언제든 이런 일이 다시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원 씨는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CP 프로그램과 부당한 인사 조치들, 그리고 주총 참가 방해와 같은 노조 활동 방해 등으로 '적응 장애'가 생겼다는 주장이다. 심의 결과는 이르면 이달 안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원 씨는 "나뿐만이 아니다. KT 직원 대다수가 출구가 없는 곳으로 내몰리고 있다. 회사는 실적이 떨어지자 일선 직원들에게 더 많은 상품을 팔고 더 좋은 실적을 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지금이라도 KT는 직원들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KT "업무상 필요에 의한 인사 조치…CP 퇴출 프로그램은 가동 안 됐다"
한편, KT 측은 원 씨에게 취해진 연쇄적 인사 조치마다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2009년 기술직으로 전직시킨 것은 "조직 개편에 따른 정기 인사의 일환"이었다고 했고, 2010년 남원 발령은 "영업 부문 역량 강화를 위한 발령"이었다고 했으며, 2011년 해고는 "업무 분장에 포함돼 있는 영업 업무를 거부"한 데 따른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이후 내려진 3개월 징계는 원 씨가 "업무 방해를 해 형사 처벌을 받은 점과 '죽음의 기업'이라고 주장해 회사 명예를 훼손한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했으며, 포항으로 원거리 발령을 한 것에 대해선 "조직 분위기 쇄신 등의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CP를 인정하는 법원 판례가 최근 연이어 나왔음에도 불구, "CP를 실제 가동한 적이 없다"는 기존 설명을 고수했다. 포항에 허름한 거처를 제공했다는 원 씨의 주장에 대해선 "본인이 입주 신청서까지 제출하고도 의도적으로 사택에 입주하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2009년 1월 주주 총회 납치 미수 사건에 대해선 "민주동지회 회원들이 이전부터 소란 행위를 벌여왔기 때문에,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예방 행위였다"며 "당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가를 만류하던 도중 발생한 사건일 뿐, 납치 등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KT 사람들 <1> KT '난청' 직원은 어쩌다 콜센터 상담원이 됐나 |
벌써 7개월째다. KT 고객 불만 처리 담당 직원 원병희(51) 씨는 반년 넘게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매일 아침 찜질방 한구석에서 눈을 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 후엔 저녁을 먹은 후 홀로 찜질방으로 돌아온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아직도 몇 번씩은 잠에서 깨 뒤척이다 다시 잠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전북 전주에서 부인, 딸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 지난 3월 초,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경북 포항으로 느닷없는 인사 발령이 났다. 원 씨는 이 발령을 '현대판 KT식 유배'라고 부른다. 노동자 연쇄 사망 사태 등을 밖으로 시끄럽게 알린 데 대한, 그리고 이석채 회장의 인사를 두고 '낙하산'이라고 손가락질한 데 대한 보복이란 것이다.
직선거리 약 230km. 차로 꼬박 3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원 씨를 '날려 보낸' KT는 포항에서 지낼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해줬다. 그러나 원 씨는 이 거처를 포기하고 낯선 찜질방을 택했다. 그는 "다 쓰러져가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성인 남자 4명이 함께 살라고 했다"며 "그곳에 있다간 우울증이 더 심해질 거 같아 입주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원 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정확하게는 '적응 장애'다. 4년여 전 진단을 받은 이래로 지금까지 25회 이상 상담 치료를 받았다. 원 씨의 담당 의사는 '당신은 다른 치료가 필요 없다. 일단 가족과 살아야 한다. 전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원 씨가 언제쯤에야 가족들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1987년 입사, 주변 부러움 한몸에 받았지만 기쁨도 잠시…
원 씨는 지난 1987년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한통)에 입사했다. 당시 나이 25세. 공공 기관에서 대민 봉사를 하고 싶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공기업인 한통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부러운 시선을 보냈고, 그 자신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었다고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입사 직후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는 "조합원들을 위해 일해야 할 노동조합 간부들은 기관장 술값을 내주러 다니느라 바빴고, 어느 날 갑자기 사무직 직원들을 기술 업무 쪽으로 강제 발령하는 일들도 버젓이 벌어졌다"며 "이런 일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연고가 없는 외딴 지역으로 전근시키는 일들도 횡행했다"고 말했다.
원 씨는 이런 회사 모습을 보면서 점점 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부당 인사 사례들을 수집하고 노동법을 공부했다. 노동부와 법원을 쫓아다니며, 몇몇 인사 조치들에 대해서는 부당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동시에 사내 민주화를 위해 KT 내에 꾸려진 '민주동지회'에 가입, 노조 간부 선거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원 씨가 KT의 악명 높은 살생부, 이른바 '1002 명단'에 오르게 된 배경이다.
'살생부 1002 명단'과 도(道) 경계를 뛰어넘은 원거리 발령
'1002 명단'은 2011년 한 공익 제보자에 의해 폭로돼 일대 파문을 일으킨 KT 내부 문건이다. KT는 2005년 불법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부진 인력(CP) 퇴출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설계하며, 그 일환으로 퇴출 대상자 1002명을 추려냈다. 이후 2009년 도입한 고과연봉제에서 KT는 CP 대상자들에게 대거 D, F 등급을 매기고 연봉 일부를 삭감하거나 원치 않는 지역 또는 직무로 인사 조치했다.
원 씨 역시 이 1002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인사 평가 때마다 번번이 F등급을 맞은 그는 경상도와 전라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전북 부안. 이후 전북 전주, 전북 정읍, 전북 남원을 거쳐 경북 포항까지 날아왔다. 원 씨는 회사에 밉보인 것이 인사 평가에서 거듭 하위 등급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근래 것들만 떼어내서 봐도 상황은 만만치 않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취해진 굵직한 인사 조치만 다섯 건이다. 전주 팔복 전화국 사무직에서 현장 기술직으로 전직(2009년 2월), 전주에서 남원으로 원거리 발령(2010년 2월), 중노위에서 부당 해고로 판정된 해고(2011년 6월), 복직 직후 떨어진 3개월 정직(2012년 10월), 정직 직후 포항으로 원거리 발령(2013년 3월).
"이런 인사 조치를 누가 업무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보겠나. 예컨대 기술 업무라는 건 20~30년씩 해온 전문가들도 자칫하면 사고가 나는 전문 업무다. 전봇대에 올라야 하고 복잡한 기술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데에 기술력도, 경험도 없는 사람을 느닷없이 배치하는 것은 압박을 줘서 내쫓으려는 계산된 의도에서 비롯된 거다."
▲ KT의 '살생부'로 불리는 '부진 인력(C-PlayerㆍCP)' 프로그램이 담긴 문건. 비고란에는 '단순 추종자'나 `농성 적극 가담'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
이석채 회장 취임을 몇 시간 앞두고, '잠깐 좀 같이 가자'
집요한 인사 조치와 함께 '적응 장애'란 질병을 만든 결정적 사건이 있다. 2009년 1월 14일 이석채 회장이 취임하던 주주 총회를 몇 시간 앞두고 벌어진 "납치 미수 사건"이다.
원 씨와 몇몇 민주동지회 동료들은 당시 주총에서 이석채 신임 회장에게 새 경영 전략과 구조조정 방침 등에 관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던지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회장이 KT의 새 사령탑을 맡음과 동시에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될 거란 우려가 안팎으로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계획은 어느새 새어나갔고, 회사는 '주총 방해 세력'을 단속하는 데 분주했다. 갖은 설득과 회유에도 원 씨가 주총 참석을 고집하자, 행사 전날 저녁엔 열 명가량이 원 씨의 집까지 찾아와 위협적인 설득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원 씨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자, '일단' 집 앞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인 14일 새벽 4시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전해졌을 거라 생각하고 집을 나선 원 씨를 밤새 승합차 안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들이 일순간에 에워싸고 무작정 동행을 강요한 것.
"그날 새벽에 눈이 많이 내렸던 게 기억난다. 아파트 입구를 딱 나오자마자 새카만 사람 10여 명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들었다. '왜 이러냐'고 하니까 일단 '잠깐만 좀 가자'고만 했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다 아는 직원들이었다. 결국 다시 경찰을 불렀고, 경찰차를 타고 인근 지구대로 일단 도망갔다."
지구대에 잠시 머무르면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지구대 주변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마음이 급해진 원 씨는 약속 장소인 모 톨게이트까지 데려다 달라고 경찰에 부탁했다.
"경찰차를 타고 가는데도 뒤에서 계속 차를 몰고 따라오더라. 톨게이트에 도착해 동료가 주차해놓은 차로 옮겨 타려고 하니 우르르 달려와 에워싸서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경찰이 주변에 있는데도 거침이 없어 놀랐다. 결국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인근 시민 단체 사람들을 부르고 한 시간가량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다 해가 뜨자 풀어줬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주총에 참석할 수는 있었지만, 이 일은 원 씨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다. 원 씨는 "이날 이후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불쑥불쑥 올라온다"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생각해봐라. 캄캄한 밤에 성인 남자 10명 정도가 우르르 나를 에워싸는 광경을. 이날 받은 충격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에게도 상처
KT에 맞선 지난한 싸움으로 트라우마가 깊어진 건 원 씨만이 아니다. 이를 옆에서 줄곧 지켜본 가족들에게도 쉽사리 아물지 않을 상처가 생겼다. 원 씨는 "하도 인사상 불이익을 많이 겪으니 딸과 아내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나 못지않게 많이 받았다"며 "주총 납치 미수 사건은 너무 엄청나서 딸에게는 몇 년이 지나고서야 얘기해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몇 달 전엔 원 씨의 부인이 갑자기 신체 마비 증상을 보여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딸한테 5월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울면서 '엄마가 돌아가실 거 같다'고 하더라. 무슨 말이냐고 놀라 물으니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고 손발이 마비돼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멀리 포항에 떨어져 가족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니 무기력했다. 겨우 휴가를 내서 가보니 딸과 전주에 있는 친인척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겼더라. 그러나 언제든 이런 일이 다시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원 씨는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CP 프로그램과 부당한 인사 조치들, 그리고 주총 참가 방해와 같은 노조 활동 방해 등으로 '적응 장애'가 생겼다는 주장이다. 심의 결과는 이르면 이달 안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원 씨는 "나뿐만이 아니다. KT 직원 대다수가 출구가 없는 곳으로 내몰리고 있다. 회사는 실적이 떨어지자 일선 직원들에게 더 많은 상품을 팔고 더 좋은 실적을 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지금이라도 KT는 직원들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KT "업무상 필요에 의한 인사 조치…CP 퇴출 프로그램은 가동 안 됐다"
한편, KT 측은 원 씨에게 취해진 연쇄적 인사 조치마다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2009년 기술직으로 전직시킨 것은 "조직 개편에 따른 정기 인사의 일환"이었다고 했고, 2010년 남원 발령은 "영업 부문 역량 강화를 위한 발령"이었다고 했으며, 2011년 해고는 "업무 분장에 포함돼 있는 영업 업무를 거부"한 데 따른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이후 내려진 3개월 징계는 원 씨가 "업무 방해를 해 형사 처벌을 받은 점과 '죽음의 기업'이라고 주장해 회사 명예를 훼손한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했으며, 포항으로 원거리 발령을 한 것에 대해선 "조직 분위기 쇄신 등의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CP를 인정하는 법원 판례가 최근 연이어 나왔음에도 불구, "CP를 실제 가동한 적이 없다"는 기존 설명을 고수했다. 포항에 허름한 거처를 제공했다는 원 씨의 주장에 대해선 "본인이 입주 신청서까지 제출하고도 의도적으로 사택에 입주하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2009년 1월 주주 총회 납치 미수 사건에 대해선 "민주동지회 회원들이 이전부터 소란 행위를 벌여왔기 때문에,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예방 행위였다"며 "당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가를 만류하던 도중 발생한 사건일 뿐, 납치 등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