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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쳐가는 산재 소송…외로운 투병…‘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 KT 비극의 행렬 (중) 또다른 고통 ‘생존자 증후군’
한겨레
kimyh@hani.co.kr

▶◀ KT 비극의 행렬 (중) 또다른 고통 ‘생존자 증후군’


직원들의 자살과 사망이 잇따르면서 케이티(KT)에는 ‘생존자 증후군’이 만연해 있다. 생존자 증후군이란 실업을 걱정하는 사람이 실제로 실업을 당한 사람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발생하는 일종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말한다. 케이티에는 구조조정, 인력 전환배치, 퇴출 프로그램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해도 만성불안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생존자 증후군은 산업재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살아남은’ 케이티 노동자들은 심근경색이나 뇌출혈 등 순환기계통 질환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거나 후유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
 
순환기계통 질환은 대부분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잇따른 죽음의 원인임을 가늠하게 한다. 그럼에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긴 시간 소송에 지쳐 싸움을 포기하고 회사의 외면 속에 외롭게 투병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생존자 증후군에 시달리다 쓰러져 숨지거나 병원에서 쓸쓸히 재활하고 있는 케이티 노동자 3명의 사연을 소개한다.

 
“스트레스로 돌연사” 가족 호소는 기각되고

 
■ 2년 걸린 다툼…지쳐 포기한 가족 이아무개(사망 당시 38살)씨는 케이티 입사 15년 만인 2010년 5월 서울 아현지사에서 쓰러져 숨졌다. 뇌출혈이었다. 구조조정의 험난한 파도에서 살아남았으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감까지 극복해내진 못했다. 이씨의 유족들은, 가족과의 불화도 지병도 없었다며 회사 업무 관련 스트레스가 아니라면 돌연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2000년께부터 회사에서 상시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이씨는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 ‘어차피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고3 수험생처럼” 집과 회사만 기계처럼 오갔다고 한다. 회사 동료들이 사직서를 던지거나 회사에서 쫓겨날 때마다 조용한 성격의 이씨는 더욱 어두워져 갔다.

 
2009년 그는 회사를 떠날 마음을 먹었다. 인력 재배치가 이뤄진다는 소문을 듣고서다. 고객회선실에서 인터넷·전화 회선을 담당하는 내근직으로 일해온 이씨는, 현장에서 전봇대에 올라가 전화 개통 업무를 맡게 될 수도 있다고 들었다. 키 170㎝에 몸무게 120㎏인 이씨는 공포스러워했다고 한다. 이씨의 유족들은 “2009년 주변에서 인력 재배치가 시작되면서 (이씨가) 명예퇴직하고 싶다, 스트레스 없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전했다.

업무전환·영업압박 시달리다 쓰러져
유족, 2년 법정싸움 지쳐 항소 포기

 
다행히 이씨는 전봇대 탈 일을 맡진 않았다. 고객회선실에 남았지만, 이듬해부터 시작된 전사적 영업 압박으로 이씨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소심한’ 이씨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자기 돈을 내주면서 친구들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줬고, 가족에게도 휴대전화를 사게 했다. 그렇게 한달에 고작 네댓대의 휴대전화를 팔았다. 그 와중에 2009년 8명이던 팀원은 퇴사·전근 등으로 빠져나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는 늘어난 업무량보다 떠나는 동료들을 보는 것을 더욱 힘들어했다.
 

유족들은 2011년 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유가족을 도왔던 노무사는 “대부분 과로 인정을 먼저 받아야 업무 스트레스 부분을 고려하게 되는데 이씨는 과로 부분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케이티 쪽은 “공단은 사망과 업무의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2년이 걸린 1심 판결에서 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이씨의 건강을 진단했던 의사는 소송 당시 “구조조정과 업무환경의 변화로 인한 요인이 크다”고 밝혔지만, 법원은 업무상 과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소송 과정에서 케이티는 과로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이씨의 업무처리 내역을 달라는 요구를 1년 반 동안 “준비중”이라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 케이티 쪽은 “당시 해당 사업장에서 법원에 자료를 제출했다”고 밝혔지만, 담당 노무사는 “자료는 두차례 요청했지만 케이티 쪽은 한번만 요청에 응했다. 이씨가 속한 팀의 노동자 수가 반으로 줄어들면서 늘어난 업무량에 대한 핵심적인 자료는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담당 노무사는 “이씨의 동료들은 심지어 ‘증인으로도 부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씨의 가족은 싸움을 포기하고 그를 마음속에 묻기로 했다. “길고 힘든 싸움에 지쳤다”고 했다.
 

30년간 온힘 다해 일한 대가는 마비된 몸

 
■ 삶을 빼앗아간 회사…싸움은 엄두도 못 내 신아무개(58·여)씨는 충북 청주시의 한 재활병원에서 4년 동안 투병중이다. 4명이 함께 생활하는 재활병원 병실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다. 평생직장이라 생각해온 케이티에서, 2009년 4월 모든 것을 잃었다.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된 신씨는 목발 없이 걸음을 떼기 어렵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보다 많이 호전됐지만 옛일은 기억조차 뚜렷하지 않다. 그는 케이티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는 것 자체를 꺼렸다.
 

 신씨는 정부가 1981년 체신부에서 전기통신사업을 분리해 케이티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를 만들 때부터 일했다. 전화번호를 안내하는 114 업무였다. 신씨는 30여년간 고객 상담 전화를 받고 서비스 창구에서 고객을 상대해왔다. 114 콜센터가 분사한 2001년 신씨에게 퇴직 압력이 시작됐다. 회사 관계자들은 신씨의 남편한테까지 전화를 걸어 “부인이 회사를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힘겹게 버텨낸 그에게 10여년의 고난이 시작되던 참이었다.

 
 괴롭힘이 시작됐다. 근무지가 수시로 바뀌었다. 충북 청주에서 영동으로 발령이 났다. 업무 인수인계도 해주지 않아 근처 옥천지점에 있는 동료에게 일을 배웠다. 상사는 유독 신씨의 출퇴근 시간만 꼼꼼히 기록했다. 눈치를 보느라 정시 퇴근은 꿈도 못 꿨다. 신씨는 “정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회사에 들어가면 수위실에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출근했냐고 물었다”고 했다. 2006년 청주로 다시 근무지가 바뀌면서 전화 설치 업무가 맡겨졌다.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달고 가정을 방문해 전화를 연결하는 일이다.

114업무 하다 전봇대 전화작업 배치
뇌출혈로 쓰러져 4년째 병원서 재활

 
   휴대전화 영업도 떠안았다. 회사에서는 압박이 이어졌다. “당신이 받는 월급이 얼만데 이렇게 실적이 나빠 쓰겠어. 핸드폰 개통 건수는 왜 이리 적어?” 매일같이 듣던 핀잔이다. “자꾸 혼나니까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그의 발음은 오른쪽 입에서 새어나갔다. 신씨는 “눈 쌓인 아파트 옥상에서 다리가 겹질려 깁스를 하기도 하고, 사다리에서 떨어져 갈비뼈에 금이 간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2009년 초, 그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동료들에게 “올해 12월까지만 회사를 다니고 이제 그만둘 생각”이라고 했다. 실적 부진 사유서를 매일 쓰는 것도, 노골적인 퇴사 압력을 견뎌내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회사에 퇴사 결심을 알리고 나서도 압박은 줄지 않았다. 참다 못해 “나간다는데 왜 이러냐”고 따지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불행은 그해 2월 찾아왔다. 회사에서 ‘텔레비전 셋톱박스(수신기)’를 갖고 오라는 말을 듣고 운전하던 중 교통사고가 났다. 좌회전하는데 끼어든 차가 신씨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기에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한 뒤 출근했다. “몸은 어떠냐?”는 말은 기대도 안 했다. 따돌림은 더욱 심해졌다. 현장에서 개통 업무를 하던 직원들은 장비가 있는 회사 지하 사무실로 출근하는데, 유독 신씨는 관리자들이 있는 사무실에 따로 책상을 마련해 그곳으로 오게 했다. 신씨는 “나중에 지나고 보니 부진 인력 퇴출 프로그램의 대상자가 바로 나였던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두 달 뒤 그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주말에 절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졌다. 몸의 오른쪽 절반이 마비됐다. 2009년 6월 그는 명예퇴직했고, 그 뒤로 회사에서는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 신씨는 2012년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그 뒤 길고 긴 재활 치료의 시간이 시작됐다. 케이티에서의 기억은 일부러라도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30년 동안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힘겹게 지난 기억을 떠올린 뒤 병실로 향했다. 키 작은 그의 손바닥만한 등이 천천히 멀어졌다. 불과 10m도 안 되는 병원 복도를, 그의 불편한 다리는 긴 세월을 가로지르듯 천천히 끌려갔다.
 

3년만에 승소…항소심…끝도 없는 법정싸움

 
 ■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케이티에서 일하다 2010년 9월 숨진 최아무개(사망 당시 51살)씨는 유가족들의 끈질긴 싸움 끝에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겨우 1심에서 승소했다.
 

 1980년부터 30년 동안 케이티에서 일하며 전자실에서 전화 혼선 등을 방지하는 전자교환기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온 최씨는 2010년 7월 부산에 있는 케이티 구포지사 고객기술서비스팀으로 발령받았다. 내근 업무만 하던 최씨는 이때부터 각 가정을 방문해서 인터넷이나 전화를 설치하는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팀에서 10살 이상 나이 어린 후배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그는 가족에게 “일이 힘들다”고 털어놨다. 게다가 최씨는 왼손 엄지와 검지, 장지 등 세 손가락 끝마디를 사고로 잃었다. 개통 업무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다루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일을 하려면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데 손가락에 집중되는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보다 못한 최씨의 아내가 남편의 회사를 찾아가기까지 했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해요. 업무 전환을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회사 쪽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생소한 업무로 힘들어하다 심장마비
오랜 소송 시달린 유족 “너무 힘들다”

 두 달 동안 새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최씨는 그해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토요일이었던 사망 전날에도 그는 9시간 동안 일한 뒤 퇴근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불편하다”며 잠들었고, 다음날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

 
 최씨의 유가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2011년 3월 “사망 2개월 전 업무 변경이 있어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지만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유족들은 부산지방법원에 근로복지공단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소송을 냈다.

 
 2년 가까이 걸린 소송 끝에 법원은 최씨 손을 들어줬다. 올 2월 재판부는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고 여기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면 사망 원인으로 볼 수 있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30년 동안 내근 업무를 하다가 외근 업무로 전보돼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고, 10년이나 어린 동료의 보조 업무를 한 점, 손가락 장애가 있던 점 등을 미뤄 볼 때 최씨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은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항소심이 기다리고 있다. 최씨의 부인 김아무개(56)씨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박승헌 기자 abc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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