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 인사논란 끝은?②〉˝노조지부장 임기 후 위도 발령…복귀요청에 '노조 관여마라' 각서 내밀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박시형 기자)
▲ KT는 박진태 씨를 연고도 없는 섬 지역으로 유배했다. ⓒ뉴시스 |
지난 2003년 1월, 박진태 씨는 전북 부안군 위도로 발령 받았다. 인구 1500명의 작은 섬으로 부안군 격포항에서 배를 타고 45~50분을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박 씨는 이 곳에서 혼자 7년 2개월을 근무했다. 섬에서 나올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에 한 번 부안전화국에 자재를 받을 때와 1년에 열흘 정도 되는 휴가 기간뿐이었다. 근무자가 한 명 뿐이라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사택도 전화국 내에 있어 사실상 휴일 없이 24시간 꼬박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야간에 장애가 발생하더라도 대체 인력이 없어 직접 기계를 보거나 수리를 하러 가야하고, 특히 눈·비가 올 때 안테나가 틀어지면 방향을 잡기 위해 탑을 수 차례 오르내려야 했다.
그는 “천둥이 치던 날 밤, 차단기가 내려가 수리 하는데 차라리 여기서 벼락 맞고 죽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연고도 없고 제일 힘든 곳으로 채임(債任)…"유배 됐다"
박 씨는 지난 2000년 1월 1일부터 2002년 12월31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동 전화국 노조지부장을 역임했다. 당시 회사의 부당한 조치에 반발하는 등 심한 충돌이 종종 발생했다.
이에 사측은 박 씨가 지부장을 그만두자마자 책임을 물어 전북 부안의 섬으로 ‘유배’ 해버렸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은 경남 마산, 자리 잡은 곳은 서울이라 전라도 지역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다.
그는 “나를 보낼 곳은 없고 제일 힘든 곳으로 보내기는 해야 하다 보니 찾게 된 곳이 위도”라며 “당시 주재원이던 섬 주민을 해고하고 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 전북 부안군 위도 근무 당시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박 씨는 "이 사진이 위도 근무 당시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고 말했다 ⓒ박진태 |
일반적으로 도서지역은 현지 사람을 2~3개월 가르쳐 계약직으로 근무시킨다. 특히 섬 지역 사람들은 어획량에 따라 수입이 들쭉날쭉해 이 같은 주재원 근무 같은 고정적인 수입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박 씨의 경우 주재원을 해고한 사람으로 비쳐져 섬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가령 고장 수리를 하러 가면 “자네가 죄 지어서 쫒겨오는 바람에 우리 조카가 그만뒀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소문도 “일 잘하던 사람 자르고 유배자가 들어왔다”는 식으로 났다.
채임이라는 이유로 ‘도서 근무 수당’이나 ‘야근 수당’ 등도 기대할 수 없었다.
박 씨는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수차례 요청했지만 사측으로부터 '노조 관여 않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는 요구와 "거기가서도 잘난척이냐? 더 혼이 나봐야 한다"는 식의 모멸이 돌아왔다.
그의 나이 44살 때 일어난 일이다. 박 씨는 “한창 젊을 때 가서 50이 넘어 나왔다. 인생, 섬에서 다 보내고 나왔다”고 말했다.
7년만의 복귀…이어진 명퇴 면담
그가 있던 위도는 인터넷 사용은 가능했지만 사내부망 접속은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유배된 7년 동안 죽은 듯한 사람으로 지내야했다.
2009년 3월 본부 노조위원장을 통해 더 이상 노조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사측에 전달한 뒤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동료들로부터 “어떻게 연락조차 되지 않느냐“는 말만 들었다.
사내망에 접속할 수 없으니 메신저에 이름만 있을 뿐 7년 동안 접속했다는 알림이 한 번도 울리지 않았고, 여러 통 받은 사내 메일에도 답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그의 해명을 들은 뒤에야 사정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의 조용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해 4월 대규모 명예퇴직 이후 CFT(Cross Function Team)부서로 발령 나면서 박 씨는 10년 만에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CFT부서는 명예퇴직을 거부한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됐다. 하지만 구성원 291명 중 일부는 왜 이곳으로 발령났는지 설명을 듣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는 명예퇴직 면담 과정에서 부당함이 만연했다고 토로했다.
명예퇴직을 강하게 거부한 사람은 한두 번 만에 면담을 그만뒀지만 사측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순한 사람들에게는 명예퇴직을 수차례 반복해서 종용했다는 것.
박 씨는 “순한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안 나가면 임금피크제에 걸려 55세부터 임금 10%씩 깎여나가고, 전화국 업무도 없어지기 때문에 일도 주어지지 않는다’며 사람을 흔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차라리 1억~2억 원 받고 나가는 것이 절호의 찬스라 당신을 위해서 하는 얘기니까 나가야 한다는 식 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심리가 동요되고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는 직원이 속출하자 지사장실에 들어가 면담을 거부한 채 하루를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다고 했다.
▲ 박진태 씨는 CFT 팀으로 옮겨진 뒤 10년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1인 시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박진태 |
그는 또 “사측이 나에 대해 두 번 째 면담을 진행하자 한번만 더 면담하면 녹음해서 고발하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결국 면담은 없었지만 CFT행이 됐다.
"3가지 조건 중 부합하는게 있나? 없으면 버텨라"
그는 CFT부서에서 다시 사측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다. 부당한 인사 조치에 1인 시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박 씨는 CFT부서는 물론 직원들이 명퇴 권고에 흔들릴 때마다 딱 세가지 조건을 확인해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첫 번째로 미리 나갈 준비를 마쳤는가, 두 번째로 몸이 아파서 도저히 근무할 수 없는 상태인가, 세 번째로 명예퇴직 후 KT와 관련된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는가. 만약 급여 100만 원의 계약직으로 다시 근무할 것 같으면 절대 나가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서울 올라와서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사측이 계속 주홍글씨를 새겨 놓고 결국 CFT부서로 발령 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반쯤 미쳐서 다니고 있다.”
박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