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노사정 합의안에 따라 저성과자를 해고할 수 있는 일반 해고 완화를 추진 중이다. 정부는 이를 '공정 해고'라고 부른다. 일반 해고가 허용되지 않는 지금도 기업에서는 직원들을 저성과자로 분류하고 모멸감을 안겨 자진 퇴직을 유도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을 통해 '공정 해고'가 불러올 미래를 살펴봤다. [편집자말] |
▲ 김광한(가명)씨가 2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신증권의 저성과자 역량 강화 프로그램인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의 비인간성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회사 안팎에서 재교육을 표방하나 사실상 자존심을 짓밟아 퇴출을 유도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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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건드려 봐, 시너 통 들고 가서 확 다 뿌려버릴 거야."
대신증권 25년차 영업사원인 김광한(52·가명)씨는 분노를 다스릴 방법을 찾지 못했다. 화를 속으로 삭이는 게 익숙한 그가 그날은 동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냈다. 회사가 그를 '저성과자'로 분류하고, 여러 지점으로 '뺑뺑이'를 돌리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 어느 날이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지난 21일 기자와 마주앉은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비유했다. 토끼 사냥을 마치면 쓸모가 없는 사냥개는 잡아먹는다는 뜻이다. 현재 김씨는 대신증권의 저성과자 역량 강화 프로그램인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를 3년째 수행 중이다. 재교육을 표방하나 사실상 자존심을 짓밟아 퇴출을 유도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1등 신랑감'이 버려진 사냥개가 되기까지
김씨는 지난 1991년 5월 전라북도 군산지점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증권사 직원은 '1등 신랑감'으로 꼽힐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 그의 일은 고객의 자산을 끌어와 주식 등을 중개하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었다. 자신이 권유한 상품을 샀다가 피 같은 자산을 잃는 고객도 많았다. 잦은 회의감이 몰려왔지만 그만둘 용기는 없었다. 5년만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다 어느새 25년차가 됐다.
2005년 4월에는 지점장이 됐다. '지점장들의 무덤'이라 불린 전라북도 ㅇ지점이었다. 승진 경쟁을 거쳐야 하므로 지점장이 됐다는 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승진 속도도 동기들 보다 조금 빨랐다. "야 이 새끼야 너는 왜 못 해" 같은 상사의 폭언을 견디며 스스로를 채찍질한 결과였다.
'지점장들의 무덤'에서는 더 강한 채찍질이 필요했다. ㅇ지점은 그 지역 안에서 실적 하위를 맴돌아 폐점이 거론되기도 했었다. 보통 4~5년씩 지점장 자리를 유지하는 반면, 여기는 1~2년 만에 지점장이 바뀌었다. 그러나 김씨가 부임한 6년 반 동안은 같은 본부 소속 19개 지점 중 늘 5등 안에 들었다. 저성과자라는 낙인에 위축된 그가 이 시절만큼은 자신있게 성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성과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실적 하위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리한 영업이 반복됐다. 상품의 위험성보다 장점을 부각해 고객에게 권했다. 그 과정에서 한 고객은 3년 만에 퇴직금 1억 원이 반에 반 토막 났다.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고지했고 선택은 고객이 했으므로 법적 책임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도의적 책임으로 대출을 받아 손실분을 메워줬다. 어느새 쌓인 빚이 수억 원에 달했다.
그렇게 지킨 ㅇ지점을 떠난 건 2011년 10월이었다. 6년 반 만에 전라북도 ㅈ지점의 영업사원으로 발령이 났다. 징계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 두고 사내에서는 '잘렸다'고 표현했다. 의아하다는 주변인의 전화가 이어졌고, 본인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인사권자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지점장에서 잘리면 사표를 쓰는 게 관행이었지만 나갈 수 없었다. 대출금이 쌓인 그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퇴직 관행 따르지 않자, 아르바이트생과 우편물 배달 지시
▲ 신분 노출을 우려한 김씨(사진 오른쪽)의 요청으로 정면 사진은 싣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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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였다. 회사는 그에게 1년 동안 4차례 인사 발령을 냈다. 2011년 10월 1일부터 2012년 10월 1일까지 그는 전주-군산-전주-대전으로 옮겨 다녔다. 군산에서는 45일 만에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전주에서 대전으로의 이동은 사망선고와 같았다. 전북에서 20년 넘게 다진 영업 기반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었다. 고객들이 대전까지 따라올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실적은 점점 떨어졌다. 그러자 회사는 그를 전략적 성과관리 교육 대상에 포함시켰다. 1차부터 3차까지 각 단계마다 달성 목표가 주어졌지만, 일반 직원도 달성하기 힘든 수치였다. 거기에 성과 개선 계획표 제출 등 개인 과제까지 부여됐다. 악순환이었다. 결국 대기발령 상태로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3차까지 흘러들어갔다.
"성과급이나 각종 수당이 빠지니 월급이 절반 가까이 줄었고, 대출금 갚는 것도 벅찼어요. 가족들을 대전으로 데려갈 여력이 안 돼서 혼자 여관방에 장기투숙을 시작했죠. 이때 인생의 비애를 많이 느꼈어요. 가족도, 지인도 없는 완전한 객지에서 영업을 해야 하는데… 의욕도 잃고, 숨만 헐떡이며 버티는 나날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많이 울었어요."
2013년 12월 1일 부터 6개월 동안 받은 3차 프로그램은 그를 더욱 극단으로 몰아갔다. 회사는 김씨에게 '자기성찰의 기회부여 및 성과 향상을 위한 실행력 강화' 교육이라고 알렸지만, 그가 느낀 건 '모멸감'이었다. 대기발령 상태에서 그는 서울본사-송탄지점-대전지점-둔산지점-천안지점 등을 일주일 단위로 옮겨 다녔다.
지점에 가도 할 일이 없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남는 자리가 없어 일주일 내내 소파에 앉았다. 일면식도 없는 젊은 직원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때 주어진 과제는 '명함 10장 받아오기' '전단지 돌리기'였다. 대전에서 근무하는 그에게 경기도 송탄에서 받은 명함은 쓸모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25년차 영업 사원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을 해보세요. 이미 '쟤는 저성과자야'라고 낙인이 찍힌 상태예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송탄·천안으로 보내면 시쳇말로 얼마나 쪽팔리겠어요. 자리도 없고, 있어도 할 일 없이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젊은 직원들이 나를 저성과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상당히 위축됐어요. 회사에 청춘을 바쳐 충성한 대가가 고작 이런 건가 싶었어요."
마음이 고된 날이 계속 이어졌다. 25년차 부장인 그는 서울 여의도 본사 지하 1층에서 아르바이트생과 우편물을 분류하고 날랐다. 사내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사서로도 일했다. 아는 얼굴들이 다가왔을 때 왜 여기 있는지 답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도서관 바로 옆에 구내식당이 있었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KBS 별관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경기도 광명 콜센터에서 여직원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날도 있었다.
"2014년 6월 회사 임원이 명예퇴직금 받고 나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거절했어요. 명예를 회복하고 나갈 때까지 오기로 버티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해 영업했어요. 결국 목표는 달성했는데 벗어나지 못했어요. 부서장이 점수를 주는 정성평가에서 미달이었죠. 제가 일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준 점수였어요."
'토사구팽 합법화', 일반 해고 완화 추진 중인 정부
▲ 현행 근로기준법은 해고를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지만, 지난 9월 13일 노사정 합의에 따라 정부가 추진하는 일반해고 완화는 기업이 언제나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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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대신증권에는 53년 만에 노조가 생겼다. 전략적 성과 관리 프로그램이 촉매제가 됐다. 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지부는 이 프로그램이 영업점 폐쇄 계획에 따른 상시적 퇴출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지난 2011년 대신증권이 노조파괴로 악명 높은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에 의뢰한 용역보고서를 들었다. 거기엔 "외부적으로는 저성과자의 역량 프로그램으로 설계하되 내부적으로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해 잔류의지를 없앤다"라고 명시됐다.
'명함 받아오기' '우편물 분류하기' 등 모멸감을 안겨 퇴직을 유도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논란이 됐다. 이인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지난 7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이 본격 시행된 2012년 5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교육 대상자 139명 중 37명(희망퇴직14명·자진퇴직23)이 떠났다. 역량을 강화할 기회를 주는 교육을 받고도 4명 중 1명이 사표를 썼다는 얘기다. 결국 회사는 비판 여론을 받아들여 현재는 일부 프로그램을 완화해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상시적 퇴출 프로그램이라는 의혹에는 강하게 부인했다. 23일 대신증권 홍보실 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해당 프로그램은 증권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이며 퇴출이 목표라는 건 노조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밝혔다. 또한 교육 대상자 4명 중 1명이 사표를 쓴 건 "본인들의 의사였을 뿐 강요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창조컨설팅에 의뢰한 용역보고서는 "여러 참고 자료 중 하나였다"고 전했다.
성과 향상 프로그램이 퇴직을 유도한다는 논란은 이 회사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08년부터 논란이 된 KT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114 안내원 출신 여성 직원에게 인터넷 전화 개통 업무를 부여하고 울릉도 등 벽지로 보냈다. 그가 전신주와 지붕에 오르는 업무를 해내지 못하자 회사는 정년을 1년 앞두고 '업무지시 불이행과 근무태만'으로 징계해고 했다. 현대중공업에서도 희망퇴직 거부자들에게 '10년 후 내 모습 쓰기'와 같은 역량 강화와 상관없는 직무 재배치 교육을 실시해 '퇴출 예고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해고를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한다. 횡령 등 명백한 징계 사유가 있는 '징계해고'와 긴급한 경영상의 필요로 인한 '정리해고'만 허용한다.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어도 회사는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징계 해고자에게도 30일 전에 해고 예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0일 분의 통상임금을 주도록 했다. 법이 해고를 엄격하게 제한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사용자와 달리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는 임금이 생존과 직결되기에 그렇다.
해고 요건이 까다롭기에 저성과자 역량 강화 프로그램은 고용유연화를 원하는 기업에게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9월 13일 노사정 합의에 따라 정부가 추진하는 일반 해고 완화는 기업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 준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일반 해고가 합법화 된다면 그동안 퇴직을 권유하며 합의금 명목으로 쥐어주던 명예퇴직금까지 아낄 수 있다. "돈 드는 해고를 돈 안 드는 해고로 바꿨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저성과자 해고로 청년 고용을 촉진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3년째 전략적 성과관리 프로그램을 받고 있는 김광한씨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울분이 치솟는다. 그는 "25년 동안 쌓아온 인맥과 영업 노하우는 청년을 여러 명 고용한다고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정부가 장년과 청년 세대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회사를 향한 원망도 털어놨다.
"과거에 일을 했으니 지금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기업은 사회적 책무가 있잖아요. 청춘을 다 쏟아 붓고 일했던 직원들이 지금 당장 돈을 못 벌어 온다고, 더 지나면 쓸모가 없어진다고 미리 정리하는 게 참… 가혹하죠."
그는 후회한다. 녹차 티백을 우려먹은 종이컵을 하루 종일 재활용하고, A4용지를 아끼기 위해 꼬박꼬박 이면지를 챙기며 회사를 내 집처럼 여겼던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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