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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쫓아내고 9년째 우울증, 회사는 정글이 됐다

['공정해고'의 미래-하] 저성과자 해고의 그늘, '남은 자'들의 괴로움

            

정부는 노사정 합의안에 따라 저성과자를 해고할 수 있는 일반 해고 완화를 추진 중이다. 정부는 이를 '공정 해고'라고 부른다. 일반 해고가 허용되지 않는 지금도 기업에서는 직원들을 저성과자로 분류하고 모멸감을 안겨 자진 퇴직을 유도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을 통해 '공정 해고'가 불러올 미래를 살펴봤다. [편집자말]
 대신증권 저성과자 역량 강화 프로그램인 '전략적 성과 체계'의 문제점을 사회에 드러낸 이남현 노동조합 지부장이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지점 앞에서 회사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 유성호

2014년 1월 27일 오후 3시 30분. 대신증권 사내 메신저에 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지부 창립 소식이 알려졌다. '53년 무노조 신화'가 깨진 순간이었다. 지난 2011년 노정남 전 대신증권 사장이 주식워런트증권(ELW) 부당특혜 제공 혐의로 공판을 받을 때마다 경호 인력으로 차출될 만큼 '충성 직원'으로 분류됐던 이남현(44)씨가 지부장을 맡았다. 충성 직원이 노조 지부장으로 변한 건 이 한 마디 때문이었다.

"전략적 성과 체계는 역량 강화 목적이 있지만, 저성과자를 속아내는 역할도 해야 된다."

대신증권이 저성과자 역량 강화 프로그램인 '전략적 성과 체계' 도입을 알린 2012년 1월, 이씨는 담당 부서인 역량개발부 팀장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재교육을 표방하나 사실상 자존심을 짓밟아 퇴출을 유도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그에겐 전략적 성과 체계의 세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위와 같은 상사의 지침은 저성과자를 교묘하게 괴롭히라는 뜻으로 읽혔다.

"저성과자 채찍질, 내가 쫓아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남현 대신증권 노동조합 지부장은 "부서를 떠나기 직전 우연히 보게 된 창조컨설팅의 용역보고서를 노조 설립의 직접적 계기로 설명했다. 용역보고서는 "외부적으로는 저성과자의 역량 프로그램으로 설계하되 내부적으로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해 잔류의지를 없앤다"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 유성호

그해 5월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됐다. 첫 대상자로 20명이 선정됐다. 이 중 2명은 전략적 성과 체계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퇴사했다. 총 3단계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단계마다 달성해야 할 목표가 주어진다. 저성과자 아닌 일반 직원들도 달성하는 사례가 극히 드문 수치였다. 이 과정에서 온라인 강의 수강과 코칭 일지 작성 등 개별 과제를 주고, 지속적인 면담으로 저성과자들을 압박하는 게 이씨의 역할이었다.

1단계(2개월)가 끝나고 2단계로 넘어가자 회사는 이들의 직위를 박탈했다. 직위가 박탈되자 직위수당, 차등 상여 등이 지급되지 않았다. 급여가 30% 남짓 삭감되자 교육을 받는 직원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들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받아내는 일도 이씨의 역할이었다. 쏟아지는 민원을 받으며 그의 스트레스도 점점 높아져 갔다.

"모두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어요. 이 프로그램에 들어왔다는 그 자체 만으로요. '내가 여기에 왜 들어왔는지 설명하라' '왜 나를 괴롭히느냐'라는 민원 전화가 매일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신세 한탄과 설움을 제가 다 받아내면서 이런 비인간적인 프로그램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저도 괴로웠습니다."

얼마 후에는 같은 부서에서 일한 친한 동료가 성과 체계에 들어왔다. 그가 보기에는 들어올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동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건 물론, 급여 삭감으로 경제난에도 시달렸다. 이씨는 교육을 설렁설렁하는 '태업'으로 회사에 불만을 표했다. 그 결과 두 번의 경위서를 쓰고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4개월 만에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부서를 떠나기 직전 그는 또 한 번 큰 회의감에 휩싸인다. 우연한 계기로 회사가 노조파괴로 악명 높은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에 발주한 용역보고서를 본 것이다. 거기엔 "외부적으로는 저성과자의 역량 프로그램으로 설계하되 내부적으로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해 잔류의지를 없앤다"와 같은 구체적 목표가 담겨 있었다. 직원들을 퇴출하는 일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결국 이듬해 8월 인터넷에서 무작정 민주노총을 검색해 찾아갔다. 몇 차례 비밀 회동 끝에 노조가 출범했다. 회사가 전략적 성과 체계를 이용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계획했다는 소문이 사내에 번질 때였다. 출범 나흘 만에 조합원이 500명을 넘어섰다. 저성과자 낙인으로 인한 불안감이 회사 안에 팽배했음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제가 교육했던 사람들이 퇴사할 때마나 그 사람들의 삶의 기반을 내가 파괴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는 회사에서 나가는 즉시 삶의 지위가 추락하잖아요. 이들이 지금 나가면 어떤 삶을 살아갈지 뻔히 보이는데… 단지 효용가치가 떨어진다고 해서 회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잘라내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봅니다."

대신증권에서는 2012년 5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교육 대상자 139명 중 37명(희망퇴직14명·자진퇴직23)이 떠났다. 노조는 회사가 부침이 심한 증권업을 일방적으로 축소하고 부동산 투자 등으로 사업 방향을 틀면서 직원들을 선제적으로 구조조정 했다고 본다. 실제 2012년 7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총 39개 지점이 폐쇄됐다.

하지만 회사 측은 "노조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선을 긋는다. 25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홍보실 관계자는 "지점 폐쇄는 시장 상황이 안 좋은 탓에 대신증권 뿐 아니라 전 업계가 줄여나갔고, 이는 전략적 성과 체계와 인과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선제적 구조조정 시나리오라는 의혹도 부인했다. 관계자는 "증권업계 영업 트랜드 변화에 따라 직원 역량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해 도입했으며 실제로 직원들의 역량이 많이 향상됐다"고 전했다. 창조컨설팅의 용역보고서도 "참고용이었을 뿐 실제 운영되는 프로그램과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회사 지침으로 고교 후배 괴롭히다 우울증 얻기도

저성과자 역량 강화 프로그램의 그늘은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남현씨처럼 '쫓아낸 자' 역시 마찬가지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건 대신증권만의 일이 아니다. 여기,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있다.

"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 000에게 정말 미안하다"

2011년 3월, 충북 청주 흥덕구 분평동에 위치한 청주노동인권센터에 중년 남성이 찾아왔다. 자신의 우울증을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룬다고 입을 연 그는 1984년 11월 1일 KT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 공채 1기로 입사한 반기룡씨였다. 한 손에 든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며 그는 "반인간적 퇴출프로그램을 직접 시행했다"고 털어놨다.

그로부터 한 달 여 뒤인 2011년 4월 18일, 그는 기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양심선언'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반씨가 읽은 자술서에는 회사에서 퇴직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약물에 의존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담겼다. A4용지 두 장 분량의 자술서를 읽은 뒤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본인은 2006년 12월 8일자로 KT충북본부 충주지사 음성지점의 고객만족팀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2007년 2월 중순 무렵에 문○○ 당시 충주지사 ○○○○팀장이 사내 메신저로 '부진인력퇴출관리방안'이라는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이 문서를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잘 관리하고 퇴출 대상자에 대해서 특별 관리를 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반씨가 받은 문건의 겉표지에는 '출력금지 관계자 외 열람금지'라는 주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내용은 충주 지사 소속 직원 5명을 내년 9월까지 퇴출시키라는 지시였다. 명예퇴직 거부자와 노조관계자 등이 주요 퇴출 대상이었다. 생소한 업무를 부여한 뒤 저성과자로 만들고, 자진 퇴사 하지 않으면 실적 부진을 근거로 해고하는 방법이었다. 교육 참석을 금지시키는 등 소외감을 주는 내용도 담겼다.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방식으로 관리를 했습니다. 휴대폰개통이 늦어지면 구두경고를 하고, 직원들과 말다툼을 할 때에도 구두 경고를 주었습니다. 장○○을 불러다가 KT를 퇴직하고 자회사로 갈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씨가 저의 고등학교 7년 후배라 회사가 원하는 만큼 가혹하게 관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제가 부진 팀장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결국 퇴출 인력을 제대로 관리를 못할 시 어떠한 인사상의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썼습니다."

그 때부터 반씨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12월 회사의 지침대로 고교 후배인 장씨의 일일 동태를 파악하고, 주요 관찰일지를 기록했다. 상품판매를 촉구하며 구두 경고를 주고, 경고장과 업무촉구서를 반복적으로 발부하며 가혹하게 관리했다. 당연히 장씨와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됐다. 결국 이듬해 1월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시작한 그는 한 차례 휴직 끝에 2009년 12월 31일자로 명예퇴직했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회사에 대한 증오감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지금도 회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 밑에서 퇴출 대상자로 고통을 입은 장○○에 대해서는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인권 유린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KT는 이런 반인간적이고 소름끼치는 퇴출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지하고 인간을 중시하는 기업체로 거듭나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정부의 일반해고 완화, 더 많은 피해자 낳는다

다음해에도 양심선언이 이어졌다. 2012년 9월 박찬성 전 본사 인력기획부 팀장은 퇴출관련 문건을 직접 기획하고 작성했다고 밝혔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적정인력인 36600명을 유지하려고 1470명을 내보내는 불법퇴출프로그램이었다. 비슷한 시기 고용노동부 역시 KT가 퇴출 프로그램을 일부 운영했다고 인정했다. KT가 연간 수천억 원의 이익을 내는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성과자로 낙인 찍어 퇴출을 압박하는 방식이 노동자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거셌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저성과자 일반해고 완화는 이러한 '비인간성'을 합법화 해 줄 가능성이 크다. 반씨가 양심선언하기까지 전 과정을 조력한 고광복 음성노동인권센터 노무사는 정부 정책이 일터 안의 분위기를 크게 바꿀 거라고 본다.

고 노무사는 25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저성과자 일반해고는 기업 입장에서는 최후의 보루인 정규직 노동시장을 유연화할 수 있는 좋은 무기와 같다"며 "앞으로 일터에는 저성과자라는 특정한 집단이 만들어 지고, 과거 암암리에 진행되던 불법 퇴출이 떳떳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또한 "과거 KT와 같은 사례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저성과자 해고가 합법화 된다면 그땐 비난조차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2011년 양심선언을 했던 반기룡씨는 그 이후 잠시 경비원으로 일하다, 현재는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울증으로 병원치료까지 받았던 그는 지금까지 약물을 복용중이다. 9년이 지난 2015년, 반씨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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