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구매담당 부서 30대 직원 신아무개씨가 사무실에서 거래처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이었다. 휴대전화를 받아 "통화중이니 곧 다시 걸겠다"고 끊고 유선전화 통화를 마무리하는데 이번엔 휴대전화에서 '대출 상담'이라는 문자메시지가 '딩동'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문자를 지우는데 이번엔 카카오톡으로 친구의 문자가 도착했다. "왜 한 시간 전에 보낸 안부 메시지에 대해 답신이 없냐"는 채근이었다. 전화선 너머의 상대가 이메일로 제안서를 보냈다며 확인을 요청해 문서를 열어보고 있는데, 이번엔 태블릿피시를 갖고 외근중인 직장동료가 보낸 메신저가 깜빡거린다. '검토 의견을 구하는 이메일을 참조로 보냈으니, 빠른 회신을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편리함과 휴식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됐던 디지털 기기와 사무자동화 서비스가 오히려 노동시간과 강도를 높인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전자우편과 휴대전화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소통하고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자에게 부여했지만, 동시에 노동자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멀티태스킹의 빛과 그늘
지난해 국내 번역된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디지털 기기의 사용 특징인 동시 다중작업 수행(멀티태스킹)이 사고구조에 끼치는 영향을 다뤘다.
이 책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상호작용성 미디어랩의 클리퍼드 내스 교수가 101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가 소개됐다. 멀티태스킹을 많이 하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주의력이 산만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중요한 정보를 식별해내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난 연구다. 연구자들은 애초 멀티태스킹의 장점이 더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개인용컴퓨터(PC) 환경에서 스마트폰·태블릿피시 등 모바일 기기로 인해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가능해지면서 멀티태스킹은 점점 확대되고 있다. 통화하면서 다른 사람과 문자로 채팅을 하는 경우나 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를 시청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커뮤니티 관전평을 함께 보는 시청 행태가 늘고 있다.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동시에 쓰는 관행은 업무 영역으로도 확산되면서 노동강도를 높이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1일 경북 의성군 국도에서 25t 화물트럭 운전사가 디엠비(DMB)를 시청하며 운전하다가 여자사이클 선수 3명을 숨지게 하는 사고를 낸 것도 멀티태스킹의 그늘을 보여준다.
■ 경계가 사라진 일과 휴식
인터넷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사라지고 가상현실의 경험이 현실에 끼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일과 휴식의 구분이 사라진 점도 피로도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 중앙부처 최아무개 사무관은 최근 주말 휴대전화로 온 비상연락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가 부처에서 질책을 받았다. 별 내용 없이 비상연락망이 가동하는지를 점검하는 메시지였으나, 회신을 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최 사무관은 평소 퇴근 뒤나 주말에도 전자우편으로 수시로 업무를 처리해왔지만, 주말에 즉각적인 대응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질책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주말이나 퇴근 이후 업무 연락 걱정 없이 온전히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직장인은 점점 줄고 있다.
배식한 성신여대 교수(철학)는 "도시 산업사회에서는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휴식하는 때나 장소와 구분되어 있었으나, 디지털사회에서는 두가지가 분리하기 힘들게 섞여 있다"며 "디지털 기기로 인해 일과 휴식이 혼재된 상태에서 사용자는 피로감도 못 느낀 채 습관적으로 과다한 이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로감을 느껴야 대책이 나올 텐데, 자각 자체가 없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 대안은?
스마트폰과 태블릿피시를 활용한 모바일 컴퓨팅은 사용자에게 제약 없는 정보 접근이라는 편리함을 안겨주는 대신 일터를 출퇴근길은 물론 침실과 화장실로도 확장시킨 셈이다. 스마트폰을 들고 휴가를 떠나면, 산속에서도 업무 전화와 전자우편을 피할 수 없다. 스마트폰을 쓰는 것은 사용자의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이후 문제를 느껴 네트워크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프랑스 문화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지금의 녹색생태학이 회색생태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지털과 가상화기술에 의해 전통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무의미해진 만큼, 경계가 사라진 회색 시공간에서 기술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핵심적 내용이다.
고영삼 한국정보화진흥원 인터넷중독대응센터장은 "휴가나 퇴근 이후 직장으로부터 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업무시간 이후 전화를 거부할 경우 사회성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며 "정보네트워크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수 있다는 권리를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 센터장은 "'오죽하면 이 시간에 찾겠느냐'는 반론처럼 사회 전반적으로 과다한 경쟁으로 인해 생존의 논리에 내몰리는 구조에서 비롯한 것인 만큼 해결이 쉽지는 않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12월 독일 자동차그룹 폴크스바겐은 퇴근 뒤 90분, 출근 전 90분 사이에는 회사 전자우편을 보내지 않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특별한 합의와 강제를 하지 않는 이상, 디지털 시대 삶은 무한한 침투와 간섭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구본권 기자starry9@hani.co.kr
■ 멀티태스킹의 빛과 그늘
지난해 국내 번역된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디지털 기기의 사용 특징인 동시 다중작업 수행(멀티태스킹)이 사고구조에 끼치는 영향을 다뤘다.
이 책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상호작용성 미디어랩의 클리퍼드 내스 교수가 101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가 소개됐다. 멀티태스킹을 많이 하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주의력이 산만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중요한 정보를 식별해내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난 연구다. 연구자들은 애초 멀티태스킹의 장점이 더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개인용컴퓨터(PC) 환경에서 스마트폰·태블릿피시 등 모바일 기기로 인해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가능해지면서 멀티태스킹은 점점 확대되고 있다. 통화하면서 다른 사람과 문자로 채팅을 하는 경우나 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를 시청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커뮤니티 관전평을 함께 보는 시청 행태가 늘고 있다.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동시에 쓰는 관행은 업무 영역으로도 확산되면서 노동강도를 높이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1일 경북 의성군 국도에서 25t 화물트럭 운전사가 디엠비(DMB)를 시청하며 운전하다가 여자사이클 선수 3명을 숨지게 하는 사고를 낸 것도 멀티태스킹의 그늘을 보여준다.
■ 경계가 사라진 일과 휴식
인터넷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사라지고 가상현실의 경험이 현실에 끼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일과 휴식의 구분이 사라진 점도 피로도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 중앙부처 최아무개 사무관은 최근 주말 휴대전화로 온 비상연락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가 부처에서 질책을 받았다. 별 내용 없이 비상연락망이 가동하는지를 점검하는 메시지였으나, 회신을 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최 사무관은 평소 퇴근 뒤나 주말에도 전자우편으로 수시로 업무를 처리해왔지만, 주말에 즉각적인 대응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질책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주말이나 퇴근 이후 업무 연락 걱정 없이 온전히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직장인은 점점 줄고 있다.
배식한 성신여대 교수(철학)는 "도시 산업사회에서는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휴식하는 때나 장소와 구분되어 있었으나, 디지털사회에서는 두가지가 분리하기 힘들게 섞여 있다"며 "디지털 기기로 인해 일과 휴식이 혼재된 상태에서 사용자는 피로감도 못 느낀 채 습관적으로 과다한 이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로감을 느껴야 대책이 나올 텐데, 자각 자체가 없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 대안은?
스마트폰과 태블릿피시를 활용한 모바일 컴퓨팅은 사용자에게 제약 없는 정보 접근이라는 편리함을 안겨주는 대신 일터를 출퇴근길은 물론 침실과 화장실로도 확장시킨 셈이다. 스마트폰을 들고 휴가를 떠나면, 산속에서도 업무 전화와 전자우편을 피할 수 없다. 스마트폰을 쓰는 것은 사용자의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이후 문제를 느껴 네트워크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프랑스 문화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지금의 녹색생태학이 회색생태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지털과 가상화기술에 의해 전통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무의미해진 만큼, 경계가 사라진 회색 시공간에서 기술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핵심적 내용이다.
고영삼 한국정보화진흥원 인터넷중독대응센터장은 "휴가나 퇴근 이후 직장으로부터 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업무시간 이후 전화를 거부할 경우 사회성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며 "정보네트워크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수 있다는 권리를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 센터장은 "'오죽하면 이 시간에 찾겠느냐'는 반론처럼 사회 전반적으로 과다한 경쟁으로 인해 생존의 논리에 내몰리는 구조에서 비롯한 것인 만큼 해결이 쉽지는 않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12월 독일 자동차그룹 폴크스바겐은 퇴근 뒤 90분, 출근 전 90분 사이에는 회사 전자우편을 보내지 않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특별한 합의와 강제를 하지 않는 이상, 디지털 시대 삶은 무한한 침투와 간섭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구본권 기자starry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