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덥다. 진짜 무덥다. 내가 세렝게티 초원에 서 있는지 서울에 앉아 있는지 헷갈릴 만큼 날이 덥다. 그래선지 요즘 납량특집이 많이 보인다. 그 가운데 특히 등골에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기획은 '2012 범국민 초특급 납량특집 KT 870만 개인정보 유출'이다. KT를 위시한 통신사들이 그전부터 걸핏하면 콘텐츠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 드디어 리얼리티 납량특집으로 국민에게 본격 차별화된 콘텐츠를 선보일 모양이다.
이 야심찬 리얼리티 시리즈(?)의 지난 줄거리는 이러하다. 런던 올림픽으로 온 국민이 '금빛 열정'에 들떠 있는 2012년 여름, 인구의 약 6분의 1에 달하는 870만명의 개인정보가 조용히 유출된다. 방사능보다 더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바로 그 개인정보 유출이다. 박태환 선수 실격 판정을 보고 트위터에 열불을 뿜던 당신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무섭게 울린다. 받아보면 스마트폰 기종을 바꾸라는 전화다. 바꿀 때가 된 걸 어떻게 알았지? 왠지 등골이 서늘하다. 이상한 느낌에 검색을 해본다. 이런, 당신의 개인정보가 이미 털려 있다!
그런데 회사는 털린 정보를 전량 회수했으니 안심하라고 한다. 소름이 끼친다. 혹시 굴지의 IT 기업 KT의 클레임 담당자는 평생 컴퓨터로 '복사+붙여넣기'를 한 번도 안 해본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얄팍한 수작을! SNS를 뒤져보니 당신 같은 피해자들의 불만이 쇄도한다. 그 가운데 KT가 피해보상 방침을 발표한다. 기사를 찾아본 당신의 멘탈은 또다시 붕괴된다. "피해 사실이 확인되면 당연히 보상을 할 것이다."
정보 전량 회수했으니 안심하라고?
다시 강조한다. 이것은 올림픽 양궁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현재진행형 리얼리티 납량특집이다. 당신은 준비된 피해자인가? 엔딩 크레디트에 당신의 이름이 자기도 모르게 피해자 1이나 2, 혹은 675만4432쯤으로 올라가 있을 가능성은 6분의 1이다. 내 이름은 이미 명예롭게 올라 있음을 KT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했다. 자, 상황이 이렇다. 캐스팅보드에는 이미 방송통신위원회(부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헷갈리지 마시기 바란다)가 초특급 주연으로 발탁되어 있다. 망 중립성 논란 때부터 베일에 싸인 채 직무를 유기하는 캐릭터로 세간의 궁금증을 한 몸에 모아왔던 방통위다. 경찰뿐 아니라 방통위도 드디어 나름의 조사에 착수했다 하니 참으로 그 조사의 추이가 주목된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로 이번 글을 맺는다. KT가 혹시 자기 한 몸을 희생해 고도의 안티 전략으로 방통위를 물 먹이고 대한민국 IT 생태계의 모든 주민에게 프라이버시와 망 중립성의 중요성에 대해 경각심을 주려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보긴 본 모양이다. 하여간 티아라만큼 깜찍하고 런던 올림픽만큼 박진감 넘치는 'KT발 초특급 범국민 납량특집, 870만 개인정보 유출 시즌 1'. 본방 사수해 시청률 10% 찍어보았으면 한다.
장혜영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