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재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부 경쟁에서 뒤처지지 말아야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일자리를 얻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자를 돌아보지 않고 짓밟아버리는 한국사회에서 내 새끼가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없다는 공포 때문이다. 물론 부모가 살아서 자녀를 지켜줄 때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아이가 나를 떠나거나 내가 아이를 떠나게 되어 이제 아이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할 때,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찌 진실이 없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찌 진실만 있다 말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좋은 일자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간단하다. 삼성경제연구소, 경총은 말한다. ‘다른 곳보다 20% 정도 급여를 더 주고 정규직인 일자리’라고.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국책 연구기관인 KDI는 말한다. ‘30대 대기업, 공사와 금융업’이라고. 좋은 일자리에 대한 그 지배적 기준을 가슴 속에 품고 사람들은 승리를 위해 달려간다, 경쟁한다, 그리고 기뻐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조심해야한다. 그 기준을 우리 마음에 냉큼 받아들일 일이 아니니까. 삼성경제연구소, 경총, KDI가 말하는 좋은 일자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그 곳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신규 일자리 숫자는 한해 2만개가 고작이다. 2년 전인가 통계로 고교 졸업생은 60만명, 대학 졸업생은 54만명, ‘만’을 떼고 보면, 60명 중에 단 2명이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다 ‘루저’인 셈이다. 한반에 1등 하는 아이를 제외하고 모두 루저인 셈이다. 아무리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애를 써도, 그 기준을 통과한 아이는 어차피 30명 중 한명 밖에 없으니 말이다.
부모가 돈과 안정성이 중심이 된 ‘좋은 일자리’ 기준을 붙드는 순간, 아이가 한국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루저의 삶은 결정된다.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아이가 이땅을 태어날 때는 저마다 생의 목적과 가치를 품고 이 땅에서 성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그 품은 뜻을 따라 사는 어느 인생인들 고귀하지 않다 말할 것인가. 어둠 속에 빛나는 삶을 위해 자기를 투신하며 빛이 되는 삶을 추구하는 인생을, 소득과 안정성의 잣대로 어찌, 루저라 펨훼할 것인가. 그런데, 그 귀한 생명이, 프랑스나 독일 엄마의 몸을 입고 프랑스나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성공한 일생이었을텐데, 안정성과 돈이라는 폭력적 기준만 성공이라 착각하는 한국 엄마의 몸을 통해 한국 땅에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생명이 태어날 때부터 루저의 삶으로 결정된다니, 삶은 얼마나 부당한가. 그 부당한 기준을 내 던지며 저항하기는커녕, 그것을 자기 삶과 자녀 삶이 추구해야할 목표로 끌어안고 자기와 자녀를 루저로 결정짓는 부모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얼마나 잔인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