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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자에게 기업 사외이사 선출권을

진보 2013.05.18 19:50 조회 수 : 6577

노동자에게 기업 사외이사 선출권을

한겨레 김도형 기자기자블로그

창간 릴레이 기고 생각하는 나라6

상법 조항 하나만 바꾸면 가능
외자에 경영권 뺏길 염려 줄어
노동·기업·국가에 ‘일석삼조’
독일에선 이미 수십년전 시행 

홍세화 선생이 가장자리란 이름의 학습 공동체를 만드셨다 한다. 내가 비슷한 뜻의 낱말을 처음 들은 것은 70년대 후반의 대학 시절이었다. 은사였던 박동환 선생이 늘 말했던 여변(餘邊)이란 개념을 풀어쓰면 가장자리였던 것이다. 남의 아픔보다 제 아픔이 먼저였고 세상에 대한 감사보다는 분노를 먼저 배운 나는 스승의 언어에 묻어 있는 피와 눈물을 느끼기엔 아직 어렸었다. 나중에 박동환 선생은 가장자리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존재 방식을 붙음살이라고 불렀는데, 글쎄 그 말의 처절한 뜻을 나는 지금 머물고 있는 제주에서 옛 월왕 구천이 쓸개 씹듯 곱씹고 있다.

처음 와서 모슬포에서 송악산을 향해 들길을 걸을 때 너른 밭 한가운데 띄엄띄엄 정체불명의 콘크리트 조형물이 보여 무엇인가 물었더니, 일제 때 건설된 전투기 격납고라 한다. 그제야 나는 어렴풋이 이름만 들었던 알뜨르 비행장이 일제가 식민지 시절 여기 대정주민들을 동원해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일제는 이미 1920년대에 제주를 군사기지화하기 시작하여 30년대 중반에 비행장까지 완공하고 난 뒤에 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왜 하필 제주였을까? 까닭을 물으니 당시 일본에서 출발한 전투기가 한 번에 중국을 폭격하고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 내렸다 다시 날아올라 중국의 도시들을 폭격하고 돌아왔다 한다. 그러니까 언필칭 이 평화의 섬이 태평양 전쟁 때는 실전에 배치된 항공모함이었던 셈이다. 대문도 도둑도 거지도 없는 평화로운 섬을 전쟁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광분할 때, 이곳 주민들이 바위산에 땅굴을 파고 들판에 활주로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이 길을 올레길 10코스로만 알고 있는 길손들은 알고 있을까?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가장자리의 붙음살이가 그런 것이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문제는 그 고통의 종류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낮에는 밀림에 땅굴을 파고 밤에는 활주로에서 횃불을 들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처음에는 프랑스와 다음에는 미국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혈맹이라는 중국과 전쟁을 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모든 외세를 몰아내고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남의 전쟁에 동원되어 바위산에 땅굴을 파고 자기들이 농사짓던 밭을 비행장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 역사가 해방이 되었다고 바뀌었겠는가? 나라의 주인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지금 서귀포 강정 앞바다에서는 이번엔 비행장 대신 해군기지를 만든다고 자연과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어차피 한국은 전시작전통수권이 없으므로 외국과 전쟁을 수행할 자격이 없는 국가인데, 그럼 우리의 주인이 누구와 무슨 전쟁을 위해 남쪽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일까? 바보가 아니라면 미국이 중국을 노리고 해군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 것은 한편으로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미국과 중국과의 전쟁을 위해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주도 땅을 중국에 팔아먹기 위해 몸이 달아 있는 모습이다. 이미 2008년부터 중국인들은 비자 없이 제주에 입국할 수 있는데, 요즘은 그에 더하여 제주에 5억원 이상의 휴양형 리조트를 사들이거나 투자하는 외국인에게 5년이 지나면 본인과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에게 영주권을 주는 제도를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제주도의 노른자 땅을 열심히 팔고 있다. 서울 부자들이 제주의 좋은 땅은 다 차지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제는 중국 부자들에 기대어 제주도 부동산 경기를 끌어올릴 욕심인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중국을 노리고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남아도는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추파를 던지는 이런 정신분열적인 행태는 붙음살이를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에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 일찍이 함석헌은 이런 조국을 가리켜 아시아의 대로변에 나앉은 늙은 갈보라 불렀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한쪽으론 골목대장을 기둥서방 삼아 붙음살이 하면서 딴 쪽으론 이웃 사내에게 추파를 던지는 늙은 갈보가 바로 우리이다. 이런 여자에게 순정을 바칠 사내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독도 문제가 나오면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미국은 지는 해이고 중국은 뜨는 해이니 늙은 여자가 밥술이라도 얻어먹고 살려면 이웃 사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중국 역시 머지않아 수천년 동안 자기의 지배 아래 있었던 한반도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다 합치면 세계인구의 4분의 1에 가까운 중국이 한국을 차지하자고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여, 만약 당신이 시진핑 주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중국은 대국답게 한국이 해달라는 것을 해줄 것이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이름 하여 투자, 오직 몇 푼의 돈이다! 중국은 그 엄청난 외환을 조금씩 풀어 천천히 한국 주력 기업들의 주식을 사들일 것이다. 그러면 이 나라의 언론들은 ‘바이 코리아’다 뭐다 떠들면서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열심히 사서 주가가 올라간다고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국은 머지않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의 실질적인 최대 주주가 될 것이다. 아마 그 무렵이면 이건희의 아들이 삼성전자에서 왕 노릇하고 있겠지만, 중국은 매년 그에게 탕수육에 배갈을 배달해주면서 친절하게 물을 것이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너무 일이 힘들지 않냐고. 그러면 똑똑한 왕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즉각 알아듣고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알아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이 나라는 군사 주권은 미국에 내주고 경제 주권은 중국에 빼앗긴 채, 제주만이 아니라 남한 땅 전체를 중국 사람과 중국 자본에 팔아 마련한 돈으로 미국이 버리는 무기를 비싼 돈 주고 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란 이런 역사적 문맥 속에서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나라 안의 불평등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경제 주권의 관점에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이다. 경제학자들은 국제 기준에 맞게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자거나 정반대로 재벌의 기득권을 보장해주자고 제안하지만, 이는 구한말 외세에 기대어 나라를 개혁하려 하거나 반대로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의 주권을 지키려 했던 시도와 똑같이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하지만 나라의 경제 주권을 지킬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말했듯이 상법의 조항 하나만 고쳐 주식회사 법인 이사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주가 아니라 종업원에게 주면 된다. 이렇게 하면 외국 자본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아무리 많이 소유한다 하더라도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귀속되는 것이므로 나라의 경제 주권이 흔들릴 염려는 없다. 주주들 역시 여전히 주식을 사고팔아 시세차익을 챙기고 배당금을 받을 것이므로 사유재산이 침해받을까 걱정할 일도 없다.

독일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주식회사 법인의 이사회를 기업 규모에 따라 최소 3분의 1, 최대 2분의 1까지 노동자들이 추천한 이사로 임명하도록 주식법에 규정해두었다. 독일 경제의 흔들리지 않는 힘은 이처럼 노동자의 기업 경영에 대한 공동결정권(Mitbestimmungsrecht)에서 나온다. 실은 한국의 상법도 주식회사에 사외이사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인 기업의 경우 과반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외이사만이라도 종업원 총회에서 추천하도록 법을 바꾼다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도 좋고 기업의 투명한 경영을 위해서도 좋을 뿐 아니라 나라의 경제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좋은 방파제가 되어줄 것이니, 이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니겠는가.

이 글을 읽고 누가 그렇게 해준단 말인가 하고 비웃는 사람은 아직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니 그렇게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침묵할 때 외치는 것은 지식인의 사명이니, 나는 다만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다. 부디 귀 있는 자 듣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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