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을 살고 있는 직장인에게 햄릿의 명대사 ‘죽느냐, 사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됐다. 직장인들은 ‘버티느냐, 나가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희망퇴직·명예퇴직 등의 인력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가게 된 노동자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생존을 위해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기업들과 일정의 위로금을 지급받고 거리로 내몰리게 된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 이에 <머니위크>는 희망퇴직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고,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희망퇴직자와 초강수를 둔 기업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또 2016년으로 예정된 정년연장 법안의 실효성과 해외의 구조조정 사례 등 ‘희망퇴직의 시대’를 다각도에서 조명했다.
당신이 어느 기업의 과장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어느 날 사내에 도는 심상찮은 '소문'을 듣게 된다. 회사가 경영 효율화를 위해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소문은 현실로 다가온다. 회사가 "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시행하며 높은 수준의 보상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한 것.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고 버티자니 '혹시 내가 나가기를 바라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에 밤에 잠이 오지 않고 한편으로는 희망퇴직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스칠 것이다. 희망퇴직을 하면 당장 거액의 현금이 생긴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이직을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주식투자를 해 성공할 수 있다면….
◆ 금융위기 이후 최대… '너도나도' 희망퇴직
최근 이 같은 고민에 빠진 사람이 부쩍 늘었다. 저성장·저금리기조가 장기화되면서 다수의 기업들이 비용절감에 나섰기 때문.
직격타를 맞은 증권업은 물론 보험업, 은행업까지 금융권 전반에 희망퇴직 등의 인력 구조조정이 확산되고 있다.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IT, 자동차 등 호실적을 자랑했던 업계마저 비용절감을 이유로 희망퇴직을 실시했거나 계획 중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삼성증권을 시작으로 하나대투증권, 우리투자증권, NH농협증권 등이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지난 4월 삼성증권은 근속 3년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접수, 사실상 전체 임직원(2736명)의 10%에 달하는 270여명이 회사를 떠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과장급 2억원, 부장급 2억6000만원가량의 퇴직금을 지급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대투증권은 부부장급(3년) 이상 차장급(7년) 이하 근속자를 상대로 근속연수에 따라 최대 24개월치 특별퇴직금을 지급하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따라 전체직원의 8% 수준인 145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투자증권은 근무경력 20년 이상 부장급에게 월급 24개월치와 생활안정자금 등 최대 2억43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며, 우리투자증권과 합병을 앞둔 NH농협증권은 최대 26개월치 월급을 지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사는 희망퇴직 신청자가 총 500명 내외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대신증권은 창사 이래 최초로 희망퇴직을 실시, 상반기 내 진행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지만 노동조합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장기간 협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현대증권, 아이엠투자증권 등 매각을 앞둔 증권사들도 올해 안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서는 올해 희망퇴직으로 1000여명을 웃도는 '증권맨'이 여의도를 떠날 것으로 전망했다.
◆ 감원 칼바람 한동안 계속될 전망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생보업계 빅3'도 인력 구조조정을 통한 위기 탈출에 나섰다. 삼성생명은 희망퇴직, 전직지원 등을 통해 10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력감축을 계획하고 있으며 한화생명 또한 5년 만에 인력감축을 발표하며 전체직원(4738명)의 6.3%에 달하는 300여명을 줄였다. 이어 교보생명이 전체직원 45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대형보험사의 잇단 구조조정 소식에 업계에서는 중소형보험사에도 감원 바람이 불 것으로 내다봤다.
점포 폐쇄조치로 몸집 줄이기에 나선 시중은행들은 사실상 희망퇴직이 일상화됐다. 지난 2012년 희망퇴직을 단행한 한국씨티은행은 올해 근속기간이 만 5년 이상인 정규직 등을 대상으로 금융권 최고수준인 최대 60개월치 퇴직금 보장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사측은 희망퇴직을 장려하기 위해 최대 2000만원의 자녀 장학금, 퇴직 이후 3년간 종합건강검진, 200만원 상당의 여행상품권도 지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한 감축 목표인원은 최대 650명. 이에 앞서 스탠다드차타드은행, NH농협은행, 신한은행 등은 지난해 말부터 희망퇴직을 단행해 수백여명의 인력을 줄인 바 있다.
희망퇴직 바람은 산업계에도 불고 있다. KT는 15년 이상 근속직원을 대상으로 '특별 명예퇴직'을 실시하고 퇴직금 외 2년치 급여를 지급키로 했다. 이에 지난달 8320명이 회사를 떠났고 향후 퇴사인원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대규모 인력감축 과정에서 희망퇴직자들은 사측의 강압 의혹을 제기하며 "희망퇴직이 아닌 강제퇴직"이라고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르노삼성자동차는 전직지원 프로그램인 '뉴스타트 프로그램'으로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노조 측이 "강제 희망퇴직"이라며 저항해 희망퇴직자가 30여명에 그친 것으로 전해졌다. 강원랜드는 근속 10년에서 정년 잔여기간이 3년 이상 남은 부장급을 대상으로 24개월치 퇴직금을 제공하는 방식의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사진=류승희 기자 |
◆ "집단적 권고사직"… 전직지원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최근 금융권과 산업에 '트렌드'처럼 자리 잡은 희망퇴직 등의 인력 구조조정이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고용보험 피보험자격을 상실한 사람 중 경영상 필요에 의하거나 기타 회사 사정에 의한 퇴직자 수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87만8343명이 명예퇴직·정리해고로 회사를 떠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91만5311명 이래 최대치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부천상담소가 운영하는 '노동OK' 관계자는 "대기업의 희망퇴직과 관련해 사측이 암묵적으로 가하는 압박에 대한 상담이 늘고 있다"며 "특히 대기업 중견 임원급의 상담이 올해 들어 증가했다"고 말했다.
노동OK가 올해 1∼4월 희망퇴직·명예퇴직, 정리해고까지 포함한 부당해고 관련 상담건수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같은 기간 90건에서 32건이 증가한 122건을 기록했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실장은 이와 관련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희망퇴직이 확산되는 추세"라며 "사실상 희망퇴직 명분으로 자발적 퇴직을 강요하는 형식이 '집단적 권고사직'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유 정책실장은 "기업은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채영 노무사는 "IMF 이후 정리해고에 앞서 희망퇴직을 하는 게 일반적 수순이 됐다"며 "기업의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희망퇴직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이 노무사는 "기업이 노사 간 합의를 통해 희망(혹은 명예)퇴직 등의 인력 구조조정을 하는 것을 나쁘게만 볼 수 없다"며 "다만 노동자 보호를 위해 전직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