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저성장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물가마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공급이 수요를 압도하는 ‘공급 과잉’ 상태가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일본의 20년을 빼앗아갔던 디플레이션 공포가 엄습해오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물가는 공급과 관련이 깊다. 공급이 넘쳐나면 수요가 이를 따라오지 못한다.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도 재고가 쌓이게 된다.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격을 낮추면서 저물가 현상이 발생한다. 기업 이윤은 줄어든다. 이는 고용 감소로 이어진다. 구매력을 상실한 가계는 다시 소비를 줄이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현재 한국 경제는 물가가 오르긴 하되 물가 목표에 못 미치는 저물가 현상이 지속되는 단계다. 물가상승률 둔화가 지속되면 미래의 상품·서비스 가격이 더욱 낮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진다. 이 때문에 가계는 소비를 미루게 되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연기하는 ‘디플레의 함정’에 빠져 경제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한국 경제는 내수침체로 경기 회복세가 둔화되고 있다. 한국은행과 국내 경제연구기관들은 최근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하향조정했다. 이 와중에 물가 오름세마저 변변찮은 것이다. 한은은 올 하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당초 2.1%보다 0.2% 포인트 낮은 1.9%로 낮춰 잡았다. 물가안정 중기 목표인 2.5∼3.5%의 하한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2일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단순한 경기 순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라고 진단했다.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겹치는 현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디플레이션을 ‘오거(Ogre·사람을 잡아먹는 도깨비)’에 비유하기도 했다.
디플레이션은 고령화와도 맞닿아 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면 경제성장률도 하락한다. 통상 생산가능인구 하락은 ‘소비 축소→내수시장 후퇴→설비투자 감소→고용 감소→성장률 둔화→물가 하락’이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 일본은 고령화로 인한 디플레이션의 극단적인 예를 보여줬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는 2010년 100을 기준으로 2040년에는 80.2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는 2016년부터 꺾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일본을 답습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꺼번에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공급 과잉’ 현상이 심화되기도 했다. 특히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박리다매식 출혈 경쟁을 부추겼다.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급을 줄이거나 소비를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공급 과잉 업종인 자영업의 무분별한 경쟁을 막기 위해 창업을 준비 중인 이들에게 컨설팅을 제공하려는 것이 대표적이다.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 소비를 활성화시키려는 방안도 예고했다. 기업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과감한 규제 개혁과 인센티브도 마련할 방침이다. 중국이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추진했던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률이 하락하자 철강·조선 업종 등에서 과잉 생산시설에 대한 퇴출 작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세종=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