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6일 저녁 7시30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유한킴벌리 본사 6개층 사무실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이 회사는 ‘불필요한 야근’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자, 2012년 1월부터 매일 저녁 7시30분 ‘강제 소등’을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필수 야근자만 제한적으로 허용
야근 20%서 8%로 줄어들어
시차출근제 등도 호응 높아
“회사 지지·신뢰가 성공 요인”사내 커플인 ‘워킹맘’ 김현경(31)씨 부부는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출퇴근 시간이 다르다. 김씨는 오전 8시까지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고, 남편은 오전 9시30분 출근, 오후 6시30분 퇴근이다. 덕분에 부부는 맞벌이인데도 친정·시댁 부모나 보육 도우미의 손을 빌리지 않고 5살, 2살 두 아이를 기르고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회사에 있는 동안 어린이집에서 지낸다. 출근하는 남편이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맡기면, 아내 김씨가 퇴근길에 아이들을 데려와 저녁시간을 온 가족이 함께 보낸다. “오후 5시에 퇴근한다고 눈치 보이진 않아요. 늦게 출근한다고 눈치를 주는 일도 없고요.”부부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 회사 차원의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김씨 부부가 다니는 유한킴벌리는 ‘시차 출퇴근제’를 통해 오전 7~10시, 오후 4~7시 사이에 출퇴근할 수 있는 ‘권리’를 직원들에게 보장한다. 이 제도를 활용해 오전 8시30분 이전에 출근하거나 오전 9시30분 이후에 출근하는 직원이 본사 직원 580명 가운데 80여명(14%)이다. 2011년부터는 ‘탄력 점심시간제’를 도입했다. 출근시간에 맞춰 점심시간 역시 낮 11시30분~1시30분 사이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그런데 탄력적 출퇴근 시간제는 비교적 빠르게 정착한 반면 ‘불필요한 야근’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011년 회사 조사에서 본사의 경우 20% 정도가 저녁 8시 이후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그래서 나온 특단의 대책이 ‘강제 소등’이다. 2012년 1월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빌딩숲 사이 한 건물의 6개 층 사무실 전등이 저녁 7시30분 일제히 꺼졌다. 유한킴벌리다. 오전 10시 출근자들의 퇴근시간인 저녁 7시에다 30분의 ‘탈출 시간’을 추가로 얹은 시각이었다. 김혜숙(49) 지속가능경영본부장은 “‘직원들이 퇴근을 안 한다’는 고충을 토로하자 최규복 대표가 ‘그럼 불을 꺼버리면 된다’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지난 4일 저녁 7시께 찾은 유한킴벌리 본사 사무실의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남은 직원들도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손승우(49) 대외협력본부장은 “그전에도 수요일은 ‘육아 데이’라고 해서 일찍 퇴근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별 감응이 없었다. 만날 밤 9시, 10시에 퇴근하고 토요일에도 나와 일하며 살았던 탓이다. 소등제 실시 첫날 불이 꺼지는 데 충격을 받았다. ‘굳이 강제로 할 필요까지 있냐’는 불편한 감정도 있었다. 그런데 불이 꺼지니 정말로 퇴근이 빨라졌다”고 했다. 손 본부장의 아내 이순남(46)씨는 “예전에 비하면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아빠와의 대화시간이 늘면서 두 딸과의 관계도 좋아졌다”고 했다.3년 전엔 본사 직원 가운데 20% 정도가 야근을 했지만, 그 비율은 최근 8%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손 본부장은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하는 직원들의 요구가 있어서 처음에 1개 층은 ‘야근층’으로 불을 켜뒀다. 하지만 점점 수요가 줄어서 지금은 각 사무실 일부에만 불을 켜둔다”고 했다. 김 본부장은 “강제 소등제를 통해 회사가 정시 퇴근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직원들에게 신뢰를 준 것 같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유한킴벌리 직원들이 개인 좌석을 없앤 뒤 자유근무공간에서 업무를 협의하고 있다. 유한킴벌리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