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기내는 ‘개인’이 없는 곳이다. 몸매도 비슷하고 심지어 비슷하게 생긴 여승무원들이 똑같은 화장을 하고 유니폼을 입고, 말하는 방식조차 똑같다. 졍형화된 서비스가 인간으로 체화된 공간이다. 승객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만 같다. 대한항공의 에어버스 A380 기내. 김태형 기자 xogd555@hani.co.kr |
노동계약 빈틈을 비집고
주인 행세하는 기업과 소비자…
불매운동뿐 아니라
과잉친절 강요 기업도 거부해야
[한겨레21]공항을 내 집처럼 가까이해야 하는 게 나의 일이다. 긴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매번 호기를 부려보지만, 한동안 비행기를 타지 못할 때면 나도 모르게 공항으로 차를 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금단현상치고는 참으로 희귀하고 어이없다.덕분에 비행기의 속살을 볼 기회가 많다. 사람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듯이 비행기 내부에서 살림을 꾸리는 방식도 참으로 다르다. 두 가지 장면이 아직까지 머리 속에 또렷하다. 첫 번째 장면은 싱가포르항공과 대한항공을 연결하는 출장길이다. 만사를 제쳐두고 자고 싶었던 나는 식사도 거절하고 잠을 청했다. 5시간 남짓한 비행 시간이었고, 나는 도착할 즈음에야 깨어났다.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났다는 걸 알고 놀랐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다. 내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여자 승무원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식사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비몽사몽이던 내게 눈곱을 떼어낼 시간조차 주지 않은 민첩함이었다. 고맙기보다는 불편했다. 그녀가 노심초사 미몽 속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비행기 안, 나를 지켜보고 있다연결편으로 타게 된 대한항공은 ‘개인’이 없는 곳이었다. 몸매도 비슷하고 심지어 비슷하게 생긴 여승무원들이 똑같은 화장을 하고 유니폼을 입었고, 말하는 방식조차 똑같았다. 정형화된 서비스가 인간으로 체화된 공간이었다. 사무장은 다가와 고개를 90도 숙이고 인사를 한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내게 한다. 화들짝 놀라서 나도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나도 승객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 광경의 생경함에 고맙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고개 숙인 그의 어깨 위에서 나는 서늘함을 느꼈다. 저돌적인 서비스는 불편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겠다는 착각마저 주는 밀폐된 공간에서 승무원들은 승객 눈치 보느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같이 불안해졌다.두 번째 장면은 네덜란드 항공사인 KLM에서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10시간 넘게 중노동을 하는 승무원들은 건장하고 엄격하다. 기내 규칙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어느 칸에 타고 있든지 그가 누구이든 관계없다. 때로는 손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느낌마저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신뢰가 간다. 그리고 승객 이름을 수고스럽게 외워서 부른다. 나도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자신을 필요 없이 낮추는 법 없이 당당하다. 절제된 친절함이다. 식사가 제공되고, 승객이 잠을 청하면, 승무원도 자유롭다. 잠에서 잠시 깨어 화장실에 가는 길이었다. 여승무원이 컴컴한 비행기 구석에서 의자를 가져다두고 희미한 불빛 아래 신문을 읽고 있다. 눈을 잠시 마주치자, 그녀는 지금은 쉬는 시간인데, 혹시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니, 잠시 미소를 짓고 신문을 다시 읽는다. 나 또한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노동하는 당당한 개인을 보았다.네덜란드항공 여승무원 “지금은 휴식시간”또 다른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좁은 기내에서 샴페인을 제공하다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긴다. 급하게 가지고 와서 병을 열다보면, 샴페인이 터져서 승객 옷에 쏟아지는 ‘참사’도 생긴다. 연전에 어느 유럽 항공기에 탄 한국인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파란 눈의 승무원은 당황해하면서, 승객에게 티슈를 건네고 주위를 닦았다. 한국인 승객도 놀랐지만, “이건 파티 같네요” 하며 오히려 승무원을 위로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정리되었다. 어느 한국 국적 항공기에서도 같은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한국 승객이 진노했다. 여자 승객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 승객은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여승무원은 중죄인처럼 빌었고, 다른 승무원도 단숨에 달려와 용서를 구했다. 겨우 정리가 된 뒤에도, 승객은 좀체 화를 풀지 못했다. 여승무원은 비행기 뒤편으로 불려간 뒤로는 내내 풀 죽어 있었다. 같은 사고에 대한 반응은 이토록 달랐다.땅콩을 봉지째 갖다줬다며 승무원에게 폭언을 해 물의를 일으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영화 ‘카트’에서 기업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항의하는 고객을 달래기 위해 대형마트 서비스 노동자에게 무릎을 꿇게 한다. ‘영화인’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