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민의 데스크 칼럼] 386세대 퇴직 쓰나미와 '반퇴시대'
이른바 ‘386세대’인 대학선배 L씨. 1960년대 초반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녔습니다. 강의실보단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죠. ‘짱돌’이나 소주잔이 책보다 친숙했습니다. 그래도 졸업 땐 학과사무실에 수북이 쌓였던 취업추천서를 골라 취직했습니다. 직장 생활도 순탄했습니다. 80년대 후반 찾아온 ‘3저 호황’ 덕이었죠. 30대였던 90년대 말 진보정권의 산파역도 해봤습니다. 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맞았지만 용케 비껴갔습니다. 한데 지난해 복병을 만났습니다. 2016년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의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자 회사가 칼을 빼든 겁니다. 50대 고참 부장들이 줄줄이 명예퇴직 도마에 올랐습니다.
하필 정년 연장을 코앞에 두고 직장을 떠야 하는 게 야속했지만 그는 느긋했습니다. 강남 아파트 한 채에 수억원대 명퇴금도 챙겼기 때문이죠. 백수 첫 달은 꿀맛 같았답니다. 한데 은행에 맡겨둔 퇴직금 3억원의 이자를 무심코 계산해봤다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세금 떼니 달랑 월 46만5300원이 남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놓기만 하면 황금알을 낳던 아파트도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딸 둘 과외비에 치여 연금이나 질병 보험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국민연금이라도 받으려면 8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정신이 번쩍 든 L선배. 뒤늦게 이력서를 들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드라마 ‘미생’에 왜 그리 많은 사람이 공감했었는지요. 집에 가서 치킨집 얘기를 꺼냈다가 이혼 도장 찍을 뻔했습니다. 아직 대학생인 막내 등록금이며 두 딸 결혼자금까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옵니다. 앞으로 30년은 더 산다는데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하답니다. 그의 하소연, 단지 L선배 가정사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의 ‘386’은 유별난 세대입니다. 우선 인구비중(2010년 총조사)이 17%나 됩니다. 50년대생 12.8%보다 훨씬 높죠. 60년생이 만 60세가 되는 2020년부턴 한 해 80만 명 넘는 퇴직자가 쏟아집니다.
뒤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인구비중이 16.5%인 70년대생 퇴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30년 가까이 한국 사회는 L선배처럼 퇴직하고도 은퇴하지 못하고 구직시장을 맴돌 ‘반퇴자(半退者)’ 쓰나미에 파묻힐 거란 얘깁니다. 그에 비하면 이미 겪은 55~59년생 1차 베이비부머 퇴직 쇼크는 찻잔 속 태풍이었죠. 진보정권 탄생의 주역이었던 386세대가 좌절하면 어떻게 될까요? 안 그래도 좌우로 갈린 우리 사회가 ‘장그래’와 ‘마 부장’의 세대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지나 않을지요.
정년 연장이란 복병이 386세대 퇴직 쓰나미를 5년 앞당겼습니다. 한데 우리 사회는 코앞에 닥친 쓰나미에 너무 둔감한 건 아닐까요? 2%대 은행 금리론 30년 ‘반퇴 생활’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4~5%대 수익률을 보장해줄 투자상품이 절실합니다. 치킨집과 아파트 경비도 답이 될 수 없죠. 임금피크제나 시간제 일자리 활성화로 실질적인 정년 연장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진화 시계는 3저 호황을 구가했던 80년대에 멈춰버렸습니다.
‘정부가 어떻게 해주겠지’란 기대일랑 빨리 접을수록 신상에 이롭습니다. 나부터 30년 내다보고 인생설계 다시 짜야 합니다. 가뜩이나 디플레이션 공포에 짓눌린 우리 앞에 또 하나의 ‘가보지 않은 길’이 놓인 겁니다. 그 길의 끝이 어디쯤일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올 한 해 중앙일보는 이 길을 헤쳐가기 위한 지혜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모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