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인사이드] "구조조정 소나기 피하자"… 은행원 늦공부 바람
지점 수 6년새 358개 줄어 지점장 되기 갈수록 별따기… 명퇴로 직원수도 계속 감소
자격증 따면 인사 가산점, 사내 연수 등에 직원 몰려
14일 낮 12시 30분 서울 중구 신한은행백년관 10층에 있는 '열정 캠퍼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여파로 명동 거리는 한산했지만 신한은행 직원들의 독서실로 이용되는 이곳의 열람실 '열정키움' 42석은 일요일인데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오전 10시쯤 나와 자리를 잡았다는 30대 후반 김모 과장은 "최근 파생상품 관련 자격증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다음에는 꼭 붙어야 해서 공부하러 나왔다"고 말했다. 오후에 나왔다가 열람실 자리가 부족해 옆방인 회의실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해 들어 부쩍 급증한 '열공' 은행원
올 들어 공부하는 은행원이 부쩍 늘었다. 각종 업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실전(實戰) 영업 노하우를 알려주는 은행 내부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공부하는 은행원 숫자가 예년보다 눈에 띄게 증가했다. 우리은행의 경우, 사내 연수에 참여하는 직원 수가 작년 1분기(1~3월) 933명에서 올 1분기 3753명으로 3배 이상 늘었다. 우리은행 정직원 1만5000명 중 주로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은 차장급 이하인 1만1000명. 이들 가운데 4명 중 1명꼴로 올 1분기에 연수를 들은 것이다.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다. 국민은행도 내부 연수 참석자가 작년 1분기에는 1774명이었는데, 올 1분기에는 3114명으로 늘었다.
- ▲ 휴일 잊은 직무연수 - 토요일이었던 지난달 30일, 신한은행 직원 200여명이 휴일도 잊은 채 경기도 기흥에 있는 연수원을 찾아 여신과 외환 관련 직무 연수를 받고 있다. /신한은행 제공
올 3월 금융투자협회에서 실시하는 파생상품 투자권유 자문인력 시험을 앞두고, 하나은행이 문제풀이와 핵심 요약 과정을 사이버 연수로 진행하자 1000여명이 몰렸다. 우리은행이 영업 필수 자격증인 외환 전문역 1·2종과 관련해 진행한 연수에도 1746명이 참석했다. 자리가 부족해 강의를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루를 추가 편성했을 정도다.
신한은행은 자격증 시험 직전 연수원을 개방해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면서 직원들의 시험 준비를 돕고 있다.
◇지점 축소, 명퇴 바람에 살아남기 경쟁
은행이 안정된 직장이라는 것도 옛말이다. 저금리 시대에 수익이 떨어지자 은행마다 지점을 줄이거나, 명예퇴직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퇴직이나 축소 바람에 떠밀려 가지 않으려고 은행원들 스스로 몸값 올리기 위한 '열공'에 나선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은행원 10명 중 3명 정도는 지점장(부장)까지 승진이 가능했다. 요즘은 지점장 승진이 10명 중 1명 될까 말까 할 정도로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특히 과거에 상·하반기로 나눠 대규모로 신입 사원을 채용하던 시절에 입사한 1960~1965년생들이 현재 지점장 승진 대상자들인데, 이들 가운데 승진에서 누락된 인력이 쌓이면서 인사 적체가 심각하다.
게다가 은행들은 수익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지점 숫자와 인력을 계속 줄이는 추세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 2008년 4780개였던 시중은행 점포 수는 작년 말 4422개로 감소했다. KB·신한·하나(외환 포함)·우리·SC·씨티은행의 직원 수도 5년 새 9%가량(2008년 말 9만4851명→2013년 말 8만5897명) 줄었다.
이렇다 보니 은행권에서는 고객 유치나 대출 등 실적만 좋으면 된다는 것도 흘러간 얘기가 됐다. 자격증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각 은행이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자격증 관련 연수 프로그램에 직원들이 대거 몰린다.
은행원들이 주로 따는 자격증은 펀드 투자권유 자문인력, 파생상품 투자권유 자문인력, 보험대리점, 외환 전문역(1종, 2종) 등 4가지다. 자격증을 따면 직원 평가에서 하나당 가산점을 0.1~0.3점 주는 은행도 있다. 지점별로 연간 1명 시상하는 지점장상이 0.1점인 것과 비교해 보면 큰 점수다.
가산점을 받으면 자신이 원하는 보직으로 배정받게 배려해주는 곳도 있어 은행원들을 책상 앞으로 끌어당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 내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해 연수 점수를 높이거나, 자격증을 따서 인사평가에서 가산점을 받으려는 직원들이 늘었다"며 "스스로 공부하겠다는 은행원이 늘어난 게 아니라, 공부로 '내몰리는' 은행원이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한 은행 직원은 "최악의 경우 은행을 떠나더라도 자격증이 있으면 투자자문회사 등에 이직도 가능하니 너도나도 자격증을 따겠다고 주말도 반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