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화·소비 중독으로 이어져
두려움 떨칠 ‘시간의 민주화’ 필요
“밥 먹고, 빨래하고, 잠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아무런 여가시간을 갖지 못함으로써 보고 듣는 것이 없으니 점점 바보스러워져 회사로부터 더욱더 괄시당합니다.”
1970년대 후반 매일 12시간 노동을 해야 했던 한 제과업체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벌이며 썼던 글이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 사회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까? ‘장시간노동’의 원인과 문제점을 분석한 책 <과로사회>(이매진)를 최근 펴낸 김영선(39)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학술연구교수(사회학)의 대답은 “아니요”다. 노동시간은 여전히 길고, 노동자들은 ‘다른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다. 13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 교수는 장시간노동을 한국 사회의 ‘국민병’, 삶의 질을 끌어내리는 ‘질병’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간이 줄어들고는 있습니다. 연평균 노동시간이 2003년 2424시간이었는데 2010년 2193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변화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 수준의 자유시간으로는 기본 일상생활과 휴식 정도를 할 수 있을 뿐, 다른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2100시간으로 줄어도 마찬가지예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노동시간은 1749시간, 네덜란드는 1377시간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상시화하고, 소위 ‘핵심인재’들을 선별해 성과급과 각종 혜택을 집중하는 ‘분할’ 전략을 펴면서, 노동자들이 ‘잘리지’ 않기 위해, 또 회사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장시간노동을 택하는 경향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흔히 ‘요즘 신세대들은 칼퇴근을 한다더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만나본 젊은 회사원 중에 ‘칼퇴근’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이들이 ‘이 정도는 해야 성공가도를 달리지’라고 생각하며, 빨리 퇴근하는 동료들을 비난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이죠. 결국 세대가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장시간노동의 폐해는 크다. “노동자의 건강과 가족관계만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역공동체, 시민사회, 정치참여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요리를 할 시간이 없으니 외식을 하거나 가공식품을 사먹게 됩니다.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놀이카페나 문화센터에 보내 강사가 대신 놀아주게 합니다. 장시간노동은 노동자의 탈정치화, 보수화, 상품화, 소비중독, 반환경 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김 교수는 우리 스스로도 장시간노동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혼자 뒤처지지 않을까, 왕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죠. 이 두려움을 깨야 합니다. 장시간노동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 새로운 무엇인가를 할 자유가 생깁니다. 가족과 지역사회와 정치,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을 시간, 상상하고 연대하고 사랑할 시간이 생기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자기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시간의 민주화’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