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주주총회가 개최되고 있는 가운데 올해도 사외이사 후보에 대한 ‘독립성’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사외이사 제도는 대주주의 전횡을 방지하고 기업경영 전반에 걸쳐 폭넓은 조언과 전문지식을 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사외이사 제도는 1998년 첫 도입된 이래 18년이 지났지만 본연의 취지와 다르게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돼 왔다. 이는 일부 사외이사가 기업의 이익 혹은 대주주의 뜻에 따라 ‘거수기’ 역할을 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시민단체는 올해 주요기업 사외이사 후보에 오른 여러 인사에 대해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한진해운은 노형종 KSF선박금융 현 감사를 18일 주총에서 3년 임기의 사외이사로 선임하겠다고 공시했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한진해운이 거래 관계에 있는 KSF선박금융 감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은 이해 상충으로 인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부적절하다며, 노 후보의 즉각적인 사퇴를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SK이노베이션은 김준 현 경방 대표이사를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하고 18일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CGCG)는 김준 후보에 대해 반대 권고를 했다. 연구소측은 그 이유로 “김 후보와 최태원 회장은 모두 브이소사이어티의 구성원으로 브이소사이어티는 재계 2세들과 벤처기업인들이 2000년 설립한 회사다. 김 후보는 최재원 SK 부회장과 브라운대학 동문이며 최태원 회장과는 대학 동문이다. 대주주 일가와의 개인적 친분 등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 독립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반대 권고한다”고 밝혔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는 사내이사 후보로 선임된 김창근 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며 SK이노베이션 회장 겸 이사회의장에 대해서도 반대 권고했다. 연구소는 김 후보에 대해 “SK 씨앤씨의 SK(주) 주식과 최태원의 워커힐 주식의 교환 및 매매건으로 2008년 대법원에서 업무상 배임으로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은바 있다. 2008년 8월15일 특별사면을 받았으나 기업가치 훼손의 이력이 있어 반대 권고한다”고 밝혔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는 SK텔레콤의 오대식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오 후보에 대해 연구소는 “최근 SK텔레콤과 CJ헬로비젼의 인수합병 승인과 관련해 KT와 LG유플러스가 합병을 반대하고 있으며 LG유플러스는 이를 위한 법률 대리인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고용하고 있다. 오 사외이사는 2015년 11월 씨제이헬로비젼 인수와 관련된 이사회 결의에서 찬성 의견을 냈다. 오 사외이사는 태평양의 고문이며, 태평양은 회사의 주요 M&A 건과 관련해 상대방의 법률 대리를 하는 상황으로 이해상충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는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과의 조 회장과의 학연을 이유로 이석우 사외이사 후보 재선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한진칼이 사외이사로 추진 중인 조현덕 변호사와 김종준 전 하나은행장에 대해서도 자문용역 수행과 동문 등을 이유로 선임에 반대했다.
이밖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사외이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는 18일 주주총회에서 아모레퍼시픽 사외이사로 선임될 예정인 이옥섭 후보도 시민단체의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 후보가 아모레퍼시픽 전신인 ‘태평양’시절부터 오랜 기간 근무해온 내부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립성’ 훼손이 우려한 때문이다.
한화생명 정진세 사외이사도 독립성 결여를 이유로 반대 권고받았다. 정 후보는 한화건설 자회사인 검단에코텍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한화생명의 주요 주주인 한화건설 상무로 재직한 바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우, 산업은행 출신 인사를 줄줄이 사외이사로 선임할 예정이어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주요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은 한대우 전 산업은행 부행장, 금호타이어는 임홍용 전 산은자산운용 대표를 새 사외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한대우 전 산은 부행장은 산은 자본시장본부장, 상임이사를 거쳐 2013년부터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을 맡고 있다. 한 전 부행장이 자본시장본부장 재임 당시 아시아나항공은 채권단 자율협약 상태였고 태평양은 금호산업 인수 법률자문사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워크아웃에서 졸업한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산업은행 관리를 받고 있어 이들 사외이사 후보가 산은에 대한 방패막이 차원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회사 내부에서 사외이사에 반대하는 사례도 있다. KT가 대표적인 사례다.
KT는 오는 25일 개최되는 주주총회에서 차상균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을 상정했다. 차상균 사외이사는 이석채 회장이 KT 사령탑을 맡은 직후 2013년 3월 선임했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재선임될 경우 임기는 2019년 3월까지이다. KT 새노조 게시판에는 차상균 사외이사를 반대하는 의견이 다수 올라와 있다. 글 작성자는 “사외이사 차상균은 BIT프로젝트가 파산할 때까지 아무 역할도 못했다. 경영 감시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KT는 2014년 주총 전 BIT 비용 2700억원을 손실 처리해야 했다. KT 전 직원이 BIT프로젝트 실패에 대해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데 그를 또 다시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다”라고 비판했다.
여론 악화를 이유로 자진 사퇴한 사외이사도 있다.
현대중공업은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의 사외이사 선임을 추진했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민 전 행장이 SDJ코퍼레이션 고문을 맡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 개입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오는 18일로 예정된 정기 주주총회를 25일로 연기한 상태다. 민 전 행장은 지난 9일 자진사퇴했다.
우리나라 사외이사 제도는 ‘먹이 사슬’ 구조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있다. 대기업들이 장차관을 지낸 고위 관료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들은 기업의 건전한 감시자 역할이 아닌 로비스트나 대주주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이사회 안건 찬성률이 100%에 달하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미국의 500대 기업들 다수는 사외이사를 경쟁사 출신 임원을 선임하며 고위 관료 출신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주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